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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절망-스트레스’의 악순환에 잠식된 영혼
‘가난-절망-스트레스’의 악순환에 잠식된 영혼
  • 교수신문
  • 승인 2010.09.06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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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근현대의 예술가, 그 죽음의 모습

각각 질병과 가난을 이유로 우리 곁을 떠난 예술가들.
위에서부터 번호순으로 임화, 박경리, 김복진, 이청준, 이중섭, 이문구, 손상기, 채만식.
말년의 소설가 구스타프 아센바하. 휴가차 들른 베니스 해변가에서 절대적 아름다움을 지닌 소년 타지오를 두 눈으로 좇으며 죽음을 맞는다. 토마스 만의 「베니스에서의 죽음」은 죽는 순간까지도 한 소년이 지닌 순수한 관능의 아름다움에 탐닉하는 한 예술가의 죽음을 보여준다. 실제 토마스 만이 작곡가 구스타프 말로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집필했다는 이 작품은 흔히 ‘예술가의 낭만적 죽음’의 한 전형처럼 여겨지며 이후 많은 작품에 영감을 제공했다.

그러나 실제 예술가들의 죽음은 낭만과 거리가 멀다. 근대 초기 국권침탈과 해방, 전쟁을 거듭하던 시절, 시대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을 지닌 예술가들에게 삶의 비극적 귀결은 숙명과 같았다. 김복진, 임화, 한설야 등의 죽음은 한 개인의 비극을 넘어 시대의 비극으로 기억된다. 지난 6월 일본에서 뒤늦게 전해진 전후세대 대표작가 손창섭의 죽음은 여전히 우리 문단, 문화계에서 반복되고 있는 예술가들의 쓸쓸한 죽음을 상기시킨다. 그렇다면 근래 우리 곁을 떠나간 예술가들은 어떻게 생을 마무리 했을까.

계속되는 각혈로 더 이상 건축기사 일을 할 수 없었던 이상은 폐병에서 오는 절망을 이기기 위해 더욱 문학에 매달렸다. 「오감도」, 『날개』로 작가의 명성을 얻던 때도 이쯤이다. 그러나 결국 이상의 삶은 27세의 젊은 나이에 폐결핵 앞에서 굴복하고 만다. 폐병은 지금도 여전히 예술가들의 목숨을 탐한다. 2007년 하근찬에 이어 2008년 박경리와 이청준 역시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밖에 이문구와 정을병은 각각 2003년과 2009년 위암과 간암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가난의 굴레는 예술가들의 삶을 좀먹는다. 이중섭은 평생 가난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사랑하는 가족과 이별하게 된 이유도 가난이었다. 그러나 일정한 소득을 보장받지 못하는 다수의 예술가들에게 가난으로 인한 비극은 숙명처럼 반복된다. 한국의 툴루즈 로트렉으로 불리는 서양화가 손상기. 39세의 나이로 평생 ‘자라지 않는 나무’가 돼 버린 그는 죽을 때까지 아현동 굴레방 다리 근처 비좁은 화실을 벗어날 수 없었다.
2002년 바다에 몸을 던진 시인이자 철학자 강월도 역시 몸담았던 대학에서 퇴직한 후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렸다. 살고 있던 지하방마저 장마로 물이 차 더 이상 살 수 없게 될 처지에 이를 정도였다. 그와 친분이 있던 작가 조병화의 도움으로 살 곳을 마련했지만 파킨슨병이 심해지면서 그는 평소 동경해 마지않던 윤심덕처럼 바다에 몸을 던졌다.

손상기, 「겨울 강변」, 91×73㎝, 1984
세 살때 앓은 구루병으로 인해 평생 곱사등을 짊어져야 했던 그의 삶에는 늘 죽음이 가까이 있었고 숙명처럼 가난이 따라 붙었다. 어쩌면 이 그림 속 두 여인들처럼 한국근현대 예술가들은, 비록 일부이지만, 엄혹한 겨울의 삶 위에서 떨었던 것은 아닐까.

생활고와 자살마저도 범인의 삶과는 다른 예술가의 독특한 삶의 귀결이라고 치부하기에는 한 개인으로서 그들이 감내해야 하는 삶의 비극은 너무 가혹하다.
문화의 사각지대에서 예술가들의 비극적 죽음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최근 알려진 손창섭의 쓸쓸한 죽음은 해방 이후 ‘문학어’로서의 조선어에 익숙하지 않았던 전후세대 작가 다수의 비극이다. 장용학은 한글전용세대가 풍미하던 1960년대 이후 설 자리를 잃게 되고 이후 독재정권과 불화하며 모진 고문 끝에 펜을 꺾었다. 하근찬 역시 왕성한 작품 활동에도 문단의 관심에서 멀어져 현재까지 제대로 된 연구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는 “비단 전후 세대 작가 뿐 아니라 문학을 역사주의적 시각에서 시대의 반영으로 해석하는 한국 문학의 풍토가 문학과 작가를 협소한 틀에 가둔다”고 지적한다. 오랫동안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지 않거나 대중적으로 각인되지 못한 많은 문인들이 시대사적인 의미가 부여해버린 틀에 묶여 새로운 해석의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사장되고 있다.

소수의 예술가들에게만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가 예술가의 부익부 빈익빈을 부추긴다는 지적도 이어졌다. 윤범모 경원대 교수(미술사학)는 “작품의 수준보다 대중적 기호에 따라 예술가를 평가하는 분위기가 작업에만 매진하는 작가들을 소외시킨다”고 꼬집는다. 생활고에서 비롯된 작품 활동의 어려움, 이로 인한 스트레스의 악순환은 예술가들의 비극적 운명을 재촉한다. 예술계만큼 양지와 음지의 간극이 심한 곳도 없다. “서구 미술계는 작품에만 매진하는 작가들을 위해 국립 미술관이 그들의 작품을 구입하고 전시한다”는 윤범모 교수의 충고가 주는 시사점이 크다.

우주영 기자 realcosmos@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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