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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戰後’라는 呪縛에서 그를 풀어내 자유롭게 하자
이제 ‘戰後’라는 呪縛에서 그를 풀어내 자유롭게 하자
  • 방민호 서울대·국문학
  • 승인 2010.09.06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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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의 고독한 이방인 손창섭, 잠에 들다

손창섭이 지난 6월 23일 일본에서 사망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그의 유골은 한 줌 재가돼 나가타 인근 한 절에 모셔져 있다. 손창섭 생전의 모습. 그러나 1970년대초 일본으로 건너간 뒤, 그는 무성한 소문도 없이 홀로 늙어갔다.
도쿄 인근 히가시구루메 시에 있는 허름한 공영아파트로 우에노 여사를 방문했을 때, 그날은 8월 12일, 아파트 입구 7동 208호 우편함에는 ‘空家工事’중이라는 안내 전단이 붙어 있었다.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이사를 가버린 것일까. 그렇다면 병원에 있는 손창섭은 어떻게 됐단 말인가. 혹시 타계한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여사가 그를 두고 몇 십 년 동안 살아온 집에서 떠났을 리는 없지 않은가. 혹시 여사마저 무슨 나쁜 일이 생긴 것은 아닐까.


불안한 마음으로 손창섭의 흔적을 찾아 니가타까지 간 것이 공교롭게도 8월 15일. 따님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우에노 여사의 집 거실 텔레비전에서는 일본인데도 한국의 광화문 앞에서 개최된 광복절 기념행사가 비중 있게 다뤄지고 있었다.


이 날 필자는 손창섭이라는 한 고독한 인간이 이제는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어렵게 납득해야 했다. 1922.5.20~2010.6.23. 이로써 우리는 한 사람의 가장 예외적인 인간, 법칙에서 벗어난 인간 하나를 잃어버린 것이었다. 그는 한 줌 유골이 돼 니가타 인근의 한 절에 모셔져 있었다. 필자는 그의 영전에 보랏빛 꽃을 바쳤다.

일본인이 돼야 했던 작가의 비극


孫昌涉. 일본명 우에노 마사루(上野昌涉). 한국에 돌아와 이 소식을 알린 며칠 후 네이버를 검색하다 보니 그의 이름 손창섭 옆 괄호 안에 우에노 마사루라고 부기돼 있는 것이 보였다. 이렇게 부기됨으로써 그가 살아생전에 일본인이 됐고 한국, 한국인으로부터는 너무나 멀리 떨어진 존재가 된 것 같았다.


그는 언제까지 한국인이었을까. <국민일보>의 정철훈 기자는 “1973년 도일 이래 1993년까지 귀화하지 않고 한국인으로 살아왔으나 일본의 외국인 등록법에 따라 매년 등록을 갱신해야 하는 번거로움 때문에 1998년 아내의 성을 따라 귀화”했노라고 했다. 필자가 그날 들춰 본 손창섭의 수첩에는 그 자신의 필체로 우에노 마사루가 아닌 손창섭의 여권번호와 여권 발행일, 만료일이 기록돼 있었다. 발행일은 2002년 4월 2일, 만료일은 2007년 4월 2일이었다. 또한 외국인등록증의 ‘차회 확인 신청 기간’이 2004년 5월 20일로 기록돼 있었다. 이것은 손창섭이 지금껏 알려진 것보다 훨씬 늦게 귀화했을 가능성이 있음을 의미한다.


이 문제는 간단하지만은 않다. 우리 문학은 국민적, 국가적 정체성에 예민하기 때문이다. 어디선가는 분명 그가 최후에는 일본인이 됐기 때문에 그의 문학의 가치 또한 그만큼 평가절하 돼야 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신념에 따라 일본인이 된 것이 아니고 생로병사의 긴 여정 속에서 불가피하게 일본인이 돼야 했을 것이다. 우에노 여사에 따르면 손창섭은 말년에 이르러 폐질환(폐기종)을 앓았다고 한다. 그는 2008년 9월경부터 노인전문병원에 입원해야 했고 끝내 병원을 떠나지 못한 채 타계했다.


손창섭이 일본에 있으면서 <한국일보>(1976.1.1-1976.10.28)에 연재한 『유맹』에는 그를 꼭 닮은 화자가 등장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가사 일본이 지상낙원이라 하더라도 나는 일인의 냄새(자세)와 그들의 세속 풍정이 싫다. 이유나 조건을 떠나서 생리적으로 그렇다. 원래 나는 한국인도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것은 숙명이라 체념할 수가 있다. 반면 한국의 산하와 풍토는 무조건 좋다. 그 속에서 살다 죽고 싶다.”


그럼에도 손창섭은 일본으로 건너간 후 은둔자로 긴 여생을 살다 세상을 떠나버렸다. 그의 이름에는 언제나 전후문학인이라는 레떼르가 붙어 다닐 뿐 그가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걸쳐 장편소설의 긴 목록을 가진 작가임을 아는 이는 드물다. 『낙서족』, 『세월이 가면』, 『저마다 가슴속에』, 『내 이름은 여자』, 『부부』, 『인간교실』,『결혼의 의미』, 『아들들』, 『이성연구』, 『길』, 『삼부녀』,『유맹』, 『봉술랑』. 이 긴 장편소설 목록은 그가 단순히 전후 작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웅변해 준다.


그는 「비 오는 날」과 「잉여인간」과 같이 전후의 피폐한 인간상을 그린 작가일 뿐 아니라, 무엇보다 인간 개체의 삶의 여정을 인생론, 인간론의 견지에서 탐구하고자 했던 문제적 작가였다. 필자가 최근에 펴낸 『삼부녀』나 『인간교실』, 그리고 그의 문학을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고찰하고자 하는 여성연구자들의 관심을 사곤 하는 『부부』나 『이성연구』같은 작품들이 모두 그런 면모를 보여준다.


이들 작품에 나타나는 인간 개체들은 역사적, 정치적 삶을 사는 인간이기 이전에 자신에게 부여된 일회적인 생명을 이어가는 존재이며, 이 존재의 영위 속에서 남자 혹은 여자로서 부부관계나 가족 관계를 맺어 나가는 존재다. 그의 소설을 보면 한국 현대소설의 중심적 주제 유형 가운데 하나인 국가 체제의 문제가 대부분 전면에 드러나지 않고 잠복돼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그가 국가니 국민이니 민족이니 하는 집단적 층위의 삶을 인생의 본질적 성격에 비추어 부차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때문에 그의 문학은 ‘자전적’ 소설인 「신의 희작」이 보여주듯이 한 개체적 개인이 살아간다는 것 자체에 집중하며, 『삼부녀』나 『부부』나 『이성연구』가 보여주듯이 이 개체적 개인이 부부 또는 가족 관계 속에서 인생을 살아나가는 문제에 집중한다. 그 귀결점 가운데 하나는 한국사회의 인습적 체질 가운데 하나인 가부장제에 대한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해 그가 추구한 해답의 방향은 모계적 사회를 꿈꾸는 것이다. 왜 그는 아내의 성을 따라 일본 이름을 가졌던 것일까. 그것은 그가 모계적 사회를 상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이것을 입증해 줄 간단명료한 증거가 있다).

야만적인 힘과 편집적인 피를 넘어서


평양에서 태어나 만주를 거쳐 일본에 가서 성장한 그에게 한국, 한국인은 무엇이었을까. 해방이 되자 목숨을 걸고 찾아 돌아온 한국은 산하와 풍토는 무조건 좋되 전쟁과 분단과 독재로 점철돼 갔다. 뿐만 아니라 한국은 순혈 민족주의나 혈연적 가족주의가 말해주듯이 ‘힘’과 ‘피’에 집착하는 사람들의 사회였다. 그는 그런 것들이 불편했고 그런 것들에 의해 지배되지 않는 세계를 추구했다. 그것은 한국 아닌 일본이라는 식의, 국가적, 국민적 이념의 카테고리에 갇힌 유토피아가 아니었다. 그것은 야만적인 ‘힘’과 편집적인 ‘피’를 대신해서 삶을 조율해줄 새로운 원리에 대한 것이었다. 그의 장편소설들에는 그런 은밀한 시도의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그렇다면 그는 정녕 단순한 전후 작가는 아니었던 것이다. 이제는 戰後라는 주박의 카테고리에 갇힌 그를 풀어내 그 고독한 삶의 궤적에 담긴 깊은 의미를 새롭게 발견해야 할 때다. 필자에게 손창섭은 국가적, 국민적 영토의 범주에서 자유로운 문학의 탐구를 위한 새 오아시스다.

방민호 서울대·국문학

1940년 전후의 문학사를 중심으로, 일제 강점 말기라는 시대상황의 처리를 둘러싸고  당대의 문인들이 창출해 나간 고민과 탐색의 국면들을 연구하고 있다.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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