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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이론을 재검토한다] (4) 김용옥의 동양학은 ‘우리의 이론’일 수 있는가
[우리 이론을 재검토한다] (4) 김용옥의 동양학은 ‘우리의 이론’일 수 있는가
  • 강신주 연세대
  • 승인 2002.06.18 0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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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철학에 인문지식 접목 … 체계 성찰 미흡해
두번의 양심선언을 한 사람이 있었다. 첫번째는 자신의 동양사상입문 강좌 수강생들 앞에서였다. “현실을 앞서가지도 않고 뒤따라가지도 않는 보통사람”이라는 그는 “나의 생명이 허락하는 한 나는 나의 청춘을 불살라온 동양고전의 연구에 계속 정진하고 싶습니다. 나는 중국사람 콩쯔(孔子)가 죽음에 직면해 斯文에 대하여 외친 다음과 같은 말을 기억합니다. 오 ~ 하늘이시여 ! 그대가 이 문화를 아직 버리시지 않으시려 한다면, 이 나를 둘러싼 적인들 나를 어찌하겠나이까”” (1986년 4월, ‘양심선언’)라며 대학교수직을 마다하고 긴 야인생활에 접어든다. 두번째 양심선언은 ‘국민에게 드리는 글’이라는, 각언론사로 배포한 사퇴서 형식으로 이뤄졌다. “나의 지식의 한계나 신체적 능력의 한계를 말하지 않는다”는 그는 “저 자신의 실존 속에서 온축돼가고 있는 권력을 부정하는 것만이 우리 모두가 사는 길이라는 엄숙한 양심의 명령 앞에 나는 무릎을 꿇게 됐습니다.”(2001년 5월, KBS 도올의 논어이야기 방송사퇴서)라고 말한다. 이번호 ‘우리 이론을 재검토한다’는 지난 몇년간 우리 사회에서 동양학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불러모았던 도올 김용옥에 대한 비판적 독해를 시도한다. ‘전부 아니면 전무’ 식의 도올 수용 방식은 지양하는 대신, 보편과 개별을 추구하는 그의 철학 체계와 지적 여정에 다가감으로써 그가 남긴 빛과 그림자를 되짚어 보도록 한다.

강신주 / 연세대 강사·철학

김용옥은 분명 ‘우리’의 스타이다. 제도권에 있는 어떤 철학자라도 그만큼 영향력과 명성을 누린 적이 없다. 분명 그는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를 필두로 한 많은 책들과 대중강연을 통해 동양학, 좁게는 동양철학에 새로운 옷을 입혀 준 사람이다. 다시 말해 그는 압도적인 서양의 문명, 그리고 서양의 철학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박제가 돼가고 있던 동양철학에 새로운 피를 수혈한 사람이다. 물론 김용옥 본인은 이런 평가에 반론을 제기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는 동양철학이나 서양철학을 모두 극복했다고 하는 자신만의 철학체계, 즉 ‘氣哲學’을 표방하고는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의 영향력은 TV를 통해 태산을 올라가 공자를 생각하는, 노자를 통해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小國寡民의 현실성을 역설하는 동양철학자로서 가능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그의 ‘기철학’에 대한 아이디어도 동양철학 전통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점에서 이런 평가는 그렇게 지나친 것만은 아닐 것이다.

“氣哲學은 혼성모방형 종합 인문학”

김용옥에 대한 비판에 열을 올린 많은 제도 안과 밖의 학자들은 그의 이야기에 새로운 것이 없고, 항상 이미 철학을 포함한 제반 인문과학에서 다루어졌던 것들을 ‘혼성모방’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사실 그의 강연과 저술을 살펴보면, 동양으로는 유가사상, 도가사상, 불교사상을 아우르고, 서양으로는 화이트헤드, 칸트, 흄, 플라톤 나아가 양자역학, 유전공학, 분자생물학의 내용을 아우르고 있다. 한 마디로 그의 저술과 강연들은 일종의 종합 인문과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풍부하고 다양한 자료들로 구성돼 있다. 그러나 이런 풍부함에도 불구하고 김용옥은 다양한 자료들을 일관되게 엮을 체계를 전혀 갖고 있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학자들은 바로 이 점을 비판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그가 자신의 독창적 체계로 내 세운 ‘기철학’ 혹은 ‘몸의 철학’은 이런 풍부하고 다양한 자료들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많은 비판에 김용옥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그것은 나의 기철학을 어루만지는 一曲之士들의 소견이 마치 코끼리를 어루만지는 소경들 같기 때문이다. 왜 나는 이 사회의 모든 ‘파’를 주장하는 이들로부터 증오의 대상이 돼야 하는가. 그것은 그들이 서 있는 인식론적 기반과 나의 인식론적 기반이 근원적으로 비교될 수 없을 만큼 차원을 달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 그들은 도무지 나를 인식할 수 있는 인식의 틀을 가지고 있질 못한 것이다.”(‘기철학산조’, 95쪽) 그의 대답에서 대화를 거부하는 독불장군의 면모가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일단 그의 말이 참이라고 가정하도록 하자. 그렇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해야할 일은 김용옥 그 자신이 그렇게도 역설하고 있는 그만의 인식론적 기반의 전모를 파악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가 말한 ‘기철학’을 체계적으로 이해함으로써, 과연 그것이 그의 박학다식에 체계성을 부여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김용옥은 자신의 기철학의 과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의 기철학의 과제를 쉬운 말로 직언하면 다음과 같이 언명된다: ‘우주와 인간의 모든 것을 시간 속에서 해결하고자 한다.’ 이 때 ‘모든 것’이라 함은 완벽한 전칭이며 특칭이 아니다. 이 한 명제가 고수될 수 없다면 기철학은 사망을 선고받는다.”(같은 책, 52쪽) 여기서 우리는 당혹감을 느끼게 된다. 이런 당혹감은 ‘기철학’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그의 사유의 핵심이 ‘氣’라는 개념에 있을 것임을 짐작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런데 그에게 있어 시간은 바로 ‘기’의 양태에 다름 아님을 알게 되면 우리가 느끼는 당혹감은 일정 부분 사라지게 된다. “태초란 기의 均이 不均으로 바뀐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기의 中庸이 기의 過不及으로 바뀐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 기의 과불급이 곧 시간과 공간을 창출한다.”(같은 책, 53쪽) 그렇다면 결국 우주와 인간의 모든 것은 기의 균형상태[中庸]가 깨어지면서 생긴 불균형 상태[過不及] 속에서 존립되는 것이기에, 결국 그것은 시간과 공간 속에 있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이르게 되면 우리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왜냐하면 김용옥의 기철학 체계에 무엇인가 잘못돼 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의구심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표현될 수 있다. 과연 ‘기’의 ‘과불급’ 상태가 ‘시간’을 창출한다는 그의 주장은 그 자신이 호언장담한 기철학의 과제와 정합될 수 있는가.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기철학의 과제로 모든 것을 시간이란 범주로 해석해야 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 시간은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기철학의 최종 범주여야만 한다. 그런데 지금 그는 ‘시간’이 기의 운동에 존립되는 양태적인 범주일 뿐이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김용옥의 기철학의 시도는 출발에서부터 체계 내적인 모순에 빠져 있다. ‘시간’이란 범주와 ‘氣’라는 범주 중 어느 것이 최상의 범주인가. ‘시간’을 설명하기 위해 ‘기’라는 실체 범주를 도입하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 김용옥의 기철학 체계의 최상 범주는 ‘시간’이 아니라 ‘기’일 수밖에 없다. 이런 이해는 그의 다음과 같은 언명에서 확증되어질 수 있다. “氣 그 자체는 眞如門이다. 그러나 氣의 사건은 生滅門이다.”(같은 책, 101쪽) 이처럼 김용옥의 기철학의 체계는 전통적 형이상학의 두 범주인 ‘본체’(substance)와 ‘양태’(mode) 혹은 ‘영원’(eternity)과 ‘실존’(existence)의 구분에 근거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신이 전통적 형이상학을 반복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철학적 과제를 ‘시간’을 통해 모든 것을 해석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는 이 철학자의 허풍을 어떻게 이해해야만 하는가. 우리는 이 철학자를 철학자라고 부를 수 있는가.

내적인 정합성을 상실한 기철학 체계는 역설적으로 김용옥의 모든 저술과 강연들을 종합인문학이라는 ‘혼성모방’이 되도록 한다. 마치 모순의 상황에서는 어떤 귀결도 참으로 도출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나아가 이런 자기 파괴적 체계 속에서 그가 머무는 한, 그에게 가하는 모든 비판은 들리지 않게 된다. 노자의 어투를 흉내내면서 자신의 체계를 일체의 비판으로부터 벗어나게끔 하려는 이 사람에게 무슨 비판이 의미가 있겠는가. “吾道는 황당하다. 황당하기 때문에 상식적이다. … 일은 전체요 전체는 일이다. 부분의 논리에 사로잡혀 전체의 통찰을 그르치지 말라. 오도는 영감이다.” 이제 그에게 가해지는 모든 비판은 부분의 논리에 사로잡힌 ‘一曲之士’의 편협함에서 기원한 것이고, 자신의 기철학 체계는 전체의 통찰이게 된다. 우리는 김용옥이 전체의 통찰 속에 혼자 머물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독백의 철학자이기 때문이다. 김용옥의 독백의 철학이 가능한 것은 그의 체계 자체가 분열돼 있어서이다. ‘기철학자’로서의 김용옥과 ‘시간철학자’로서의 김용옥이 대화하는 데 누가 감히 끼여들 수 있겠는가.

비록 이론적 정합성은 상실했다고 할지라도 김용옥의 기철학이 ‘우리’의 삶에 대한 각고의 반성일 수 있다면, 그의 철학 체계를 ‘우리의 이론’ 속에 진지하게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여태껏 우리는 좌절된 이론이나마 ‘우리’의 삶에서 기원한 자생적 이론을 별로 가져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기대는 김용옥의 다음과 같은 언설에서 산산이 부서진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기철학이 동방인의 인간관과 우주관을 소개함을 소임으로 삼는다”(같은 책, 36쪽)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에게 ‘우리’는 없고 동방인, 즉 “한자문명권의 사람들”(같은 책, 37쪽)만이 있을 뿐이다. 한자문명권은 그 중심을 노자, 공자 등이 속한 중국문명에 두고, 그 중심으로부터의 거리를 통해 확보되는 세계를 말한다. 이 세계 속에서 우리는 주인으로서 정립되지 못했고 오직 중국이라는 중심으로부터의 거리감을 통해 자신의 삶을 영위했다. 나아가 ‘한자문명권’이라는 동일성의 확인은 결코 우리에 대한 철저한 자기 반성의 결과로 도출된 것이 아님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왜냐하면 ‘대동아공영권’의 논의가 후발 제국주의 국가로서의 일본이 자신을 중심으로 동아시아의 질서를 재편하려는 시도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한자문명권’이라는 이념도 새롭게 자본주의적 경쟁에 뛰어든 중국이 동아시아에서 패권을 다시 잡으려는 제국주의적 경향의 징후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에 바로 김용옥이 자임하는 기철학의 소임이 자리잡고 있다.

민족주의는 제국주의로부터 탄생했고 그 제국주의에 기생해서만 존속할 수 있다. 결국 동일성은 차이로부터 온다는 유행어가 옳기는 옳은 것 같다.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 되는 점은 이 차이가 한 쪽의 일방적인 힘의 우위로 이루어진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민족주의는 압도적인 타자가 우리의 삶을 자신들의 삶의 형식으로 개조시키려는 지점에서 수동적으로 탄생한다는 것이다. 민족주의로 무장한 ‘우리’는 그래서 숙명적으로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이론’이라고 했을 때, 여기서 사용된 ‘우리’가 자기 정립적인 관념이 아니라 다른 것에 의해 수동적으로 정립된 관념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우리’라는 관념은 우리를 보호도 하지만 동시에 감금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론적으로 사유했을 때 자신의 한계와 가능성을 알 수 있다. 결국 ‘우리의 이론’은 숙명적 외부 규정성을 넘어서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도약대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우리의 이론’은 자기 반성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에 대한 반성이 우리의 이론에 대한 전제 조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더 나아가야 한다. 우리의 삶을 보편성으로 인도할 이론적 작업을 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의 삶에 대한 철저한 반성으로부터 출발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동양’아닌 자기반성의 산물

그러나 지금 우리는 어떠한가. 압도적인 세계적 규모의 자본주의화(세계화), 혹은 ‘팍스아메리카나’의 시대에서 ‘우리의 것’이라는 말이 화두처럼 되고 있다. 마치 20세기 초 제국주의의 시대에 민족주의가 싹텄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도 수동적이나마 우리 자신에게 이르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한자문명권’이라는 너무나 낡은 관념적 보호막 속으로 다시 들어가려고 하고 있다. 그래서 항상 ‘우리의 것’은 너무 쉽게 ‘동양적인 것’, ‘동양정신’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지금 孔子, 老子, 莊子, 朱子, 退溪, 栗谷에 대한 관심이 ‘우리’에 대한 관심으로 오해되고, ‘忠孝’와 ‘義理’로 표방되는 봉건적 윤리질서가 잊혀진 ‘우리’의 윤리의식으로 오해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우리의 것일 수 있는가.’ 최소한 이 정도라도 의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수동적으로나마 우리의 삶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김용옥뿐만 아니라 그를 비판하는 다른 동양학 전공자들도 ‘우리’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김용옥의 붐을 타고 속출했던 ‘노자’와 ‘논어’와 관련된 무수한 책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표면적으로 김용옥을 비판하면서 등장했던 동양학자들도 김용옥과 마찬가지로 ‘우리’를 반성하지 못하고 있고, ‘우리’에게 이르지 못하고 있다는 점만이 확인될 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김용옥이 외람되이 중국의 聖人의 말씀을 잘못 읽고 있다고 지적하는 데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김용옥의 비판자들도, 이 땅에 살고 있는 진정한 ‘우리’는 빠져 있다는 점에서, 그와 동일한 작업을 수행하고 있을 뿐이다. 보조국사 지눌이 말한 것처럼 “땅에서 넘어진 자는 그 넘어진 땅에서 일어나야” 하듯이, 자신을 잃고 밀려 넘어져 있는 우리는 자신이 넘어져 있다는 것을 직시해야만 한다. 그래야 우리의 힘으로 일어설 수 있는 작은 희망이라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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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리무어 2003-12-20 16:14:06
저는 도올의 강의와 저작을 보면서 "우리"라는 개념은 "철저한 보편"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특히 도올논어를 읽으면서 유교라는 것을 새로 알게 되었습니다. 논어에 흐르고 있는 사상은 철저한 보편성의 추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