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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지배적인 자연과학적 공간개념의 대안을 찾아서
여전히 지배적인 자연과학적 공간개념의 대안을 찾아서
  • 이기흥 충남대 인문과학연구소·철학
  • 승인 2010.08.31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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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 슈테판 퀸첼 편, 『토폴로지-문화학과 매체학에서의 공간 연구』(이기흥 옮김, 에코리브르, 2010, 6)

공간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누군가가 컨테이너 식의 텅 빈 공간을 생각한다면, 이는 서구 근대 이후에 자연과학과 기술 그리고 유클리드기하학을 등에 업고 형성된 추상적 공간개념만을 접하고, 20세기에 형성된 새로운 공간(개념)들을 간과 혹은 망각한 탓일 것이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한편에서는 수용소, 실험실, 기록보관소, 경기장, 차고, 병원, 감옥, 지하실, 오솔길 등과 같은 장소들이 뭇 저자들의 관심 대상이 되고 있을 뿐 아니라(이 책 크누트 에벨링의 글 참조), 장소와 비장소, 비사이트, 헤테로토피아, 사이, 틈, 개방공간 등과 같은 새로운 공간(개념)들이 물리적 공간을 넘어 역사, 심리, 사회, 문학 및 예술작품, 영화, 건축, 도시, 컴퓨터, 인간행위 등에 내재해 있는 또 다른 종류의 공간들을 기술하고 설명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20세기는, 푸코의 말대로, 공간의 세기라고 부를 만도 하다.

이 책은(전체 텍스트를 관통해서 볼 때) 이와 같은 상황에서 태동하는 공간을 이해하는 데 요구되는 몇몇 중요한 철학적 시각과 태도, 대안적 공간개념들 및 그에 수반되는 수학적 장치들을 함께 제공한다. 우선 이 책에서 다루는 공간은 실체로서의 물리적 공간이 아닌 구조적 혹은 위치관계적 측면으로서의 공간성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일정의 조건 하에 일정의 관계를 따라 구성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공간성이, 그것이 논리적 관계에서든 아니면 실천적 관계에서든, 어떻게 조건 지어지고 혹은 어떻게 구조화되고 구성되는가를 논하기 위해서는 관계적/위상학적 사고가 요구된다.

이러한 운동에 추동력을 제공한 몇몇 전통들이 있다. 우선 칸트를 언급해야 하는데, 칸트에게서 공간은 앞에 주어진 것이 아니라 공간구성의 조건의 맥락에서 모든 외적 감각들의 현상형식으로서 공간에 비로소 자리를 마련해주는 그 어떤 것으로 이해됐으며 공간관계의 규정 및 그러한 표상들에서 일종의 결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됐다(이 관계를 더 나아가 물질론적으로 파악하느냐 아니면 관념론 혹은 주체론적으로 파악하느냐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율리아 로사우의 글 참조). 이로써 공간담론이 대상으로서의 공간에서 공간구성의 측면으로 이월해 가는 계기가 마련된다.

칸트의 관념론적 공간이론이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위상학에 의해 비판되면서 공간이론은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온다. 하이데거에게 있어 공간은 인간들의 실천적 관계를 통해 주조되고 구조화된다(카트린 부슈의 글 참조). 그의 이러한 철학적 공간사고를 현대공간이론가들은 정치철학적 혹은 사회철학적 맥락에서 설명한다. 공간은 20세기에 인식론적 이해관계가 아닌 정치적, 전략적 이해관계의 산물로 태동했다. 가령 비판적 인문지리학자들은 공간성의 논의들을 사회적 현실의 생산과 재생산의 배후에서 이해하는 가운데, 공간표상을 자연이 아닌 사회체계의 영향으로 파악하거나 혹은 사회정치적 전략의 일환으로 이해한다. 이는 이 시기의 공간논의에 문화주의적 전회가 이미 관철돼 있다는 한 징표이다.

현상학과 구조주의가 미친 영향

다른 한편, 20세기의 공간이론 형성에 현상학과 구조주의의 기여가 지대하다. 현상학자들은 객관적으로 주어진 공간에 대해 말하는 대신 항상 체험된 공간성을 출발점으로 해서 공간을 논한다. 공간을 참여자 시각 및 실천적 맥락에서 논했던 것이다(특히 공간을 여기-지금-나/체계를 기축으로 이해할 것을 촉구하는 베른하르트 발덴펠스읠 글 참조). 반면 구조주의자들은 공간을 본체론적 시각이 아닌 관계적, 차이이론적으로 다룬다. 그리고 그들에게 위상학적 사고는 그들이 사용하는 철학 그 자체이기도 했다.

구조주의자들이 선호하는 위상학적 사고 자체는 이미 수학에서 태동했다(책 2부 참조). 위상학적 사고는 라이프니츠가 공간을 수나 크기가 아니라 순전히 위치- 혹은 장소관계에서 연구하면서 태동했으며, 그의 위치분석이 오일러의 그래프이론에 전승되고, 리스팅이 장소 관계를 오직 장소들의 상호관계의 양상적 측면만을 다루면서 위상학이 수학의 한 분과가 됐고, 그리고 위상학적 이론들이 회오리이론/유체역학, 장이론, 비유클리드이론, 군이론 등으로 확장되면서 위상학은 더욱 견고해졌다.

위에 언급된 요소들의 다양한 직간접의 조합을 통해 새롭고 다양한 공간담론들을 펼칠 수 있음을 책 속의 글들이 보여준다. 가령 카를 슐뢰겔은 역사기술에서 공간적 전략의 도입을 주장하면서, 러시아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대상으로 병치적인 형태의 공간론적 모델을 사용하는 역사기술을 선보임과 동시에 답사 중심의 실천적 역사독해를 주장한다. 슐레겔의 이 입장은 드 세르토의 공간이론과도 상통한다. 롤란트 리푸너는 부르디외가 원래는 사회적 장을 위상학적으로 기술하고자 했으면서도 결국 컨테이너식 공간개념을 벗어던지지 못했다고 진단하면서 도시공간이 걷는 것을 통해 비로소 생성되고 변화한다고 주장하는 드 세르토의 도시분석을 그 대안으로 제시한다.

그런데 심리적 장의 기술에는 사회과학에서와는 다른 위상학이 적용된다. 마이 베게너는 프로이트의 자아, 초자아, 원초아의 3극 관계를 실재계, 상상계, 상징계로 재개념화하는 가운데 그 관계를 크로스캡, 보로매오매듭과 같은 위상학적 장치들을 통해 설명하는 라캉을 소개한다. 그러나 헬무트 E. 뤽의 글에 따르면, 레빈은 심리적 장을 조르당 곡선과 같은 위상학적 수단을 빌어 설명할 수 있다고 본다. 다른 한편, 요하임 후버에 의하면 이질적이고 복합적이며, 역동적이고, 창발적인 무경계도시는 호모토피, 호몰로지, 보디즘, 유체이론 등을 빌어 기술할 수 있다. 그리고  톨렌에 의하면, 건축 및 예술에서 유의미하게 논의될 수 있는 열린공간의 위상학이 칸트의 선험론적 공간개념 및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위상학에 기대어 구성될 수 있다.

위상학적 공간담론과 실천 예시

책에는 공간의 생산과 관련한 위상학적 공간담론들도 포함된다. 가령 마르크 리스는 영화에서의 카메라운동, 미장센, 편집, 몽타주, 은막의 안과 바깥, 필름의 연결방식, 영화와 관객 간의 관계설정 등의 문제를 매개로 해서 영화적 공간생산문제를 논한다(영화의 이런 공간생산기술들이 현상학적 공간과는 다른 공간을 창출해낸다는 논지를 우테 홀이 펼치고 있다). 그리고 비토리아 보르소는 텍스트에서의 공간생산문제 즉 텍스트에 공간을 새겨넣는 작업이 어떤 논리를 이용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보르헤스의 텍스트를 예로 들어 보여준다. 그리고 공간생산의 문제가 미로찾기나 조절 혹은 온/오프 회로나 선택문제인 경우, 즉 사이버텍스나 커뮤니케이션인 경우, 페터 벡스테는 그것을 분리와 연결 혹은 포함/배제라는 사이공간적인 위상학의 논리를 가지고 설명한다.

이 책은 이렇게 문화학 및 매체학에서 형성되고 있는 새로운 개념 및 유형의 위상학적 공간담론 및 실천들을 예시해준다. 거기서 발견되는 공간(개념)들은 지금까지도 헤게모니를 구가하고 있는 자연과학적 공간개념에 대한 대안적인 공간개념 즉 문화론적 공간(개념)들이 될 수 있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또 다른 방식으로 공간을 읽고 쓸 수 있는 눈과 장비를 소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공간은 무엇인가라는 앞서의 질문에 또 다른 대안적인 답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이기흥 충남대 인문과학연구소·철학

독일 마부르크대에서 박사를 했다. 논문으로는 「현대에서의 구현주의적 전회」, 「리벳실험의 대안적 해석」 등이 있고, 역서로는 『구성주의 과학철학』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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