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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문제는 1947~51년 사이 한·미·일 국제정치 관계 속에서 이해해야”
“독도문제는 1947~51년 사이 한·미·일 국제정치 관계 속에서 이해해야”
  • 김유정 기자
  • 승인 2010.08.30 13: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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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_『독도 1947』 출간한 정병준 이화여대 교수

"연구자가 되겠다고 결심한 이후 역사적으로 중요한 주제에 대해 회피하지 않고 정면승부를 거는 것, 그것이 역사학자가 추구하는 바이자 소망하는 바라고 생각했다."

정병준 이화여대 교수
거대담론과 논쟁, 주장이 넘쳐나는 시대. 온갖 ‘말’의 홍수 속에서 또 다른 말 하나 더 보태기에 앞서 작은 자료 하나에, 사료 속 문구 하나에 온 신경을 집중해 매달리는 역사학자의 뒷모습이 더 크게 다가오는 것은 왜일까. 최근 하나의 자료를 꾸준하고 진득하게 파헤친 결과물이 책으로 출판됐다는 소식이 모처럼 반갑다.

한국현대사 연구자인 정병준 이화여대 교수(45세·사진)가 『독도 1947』(돌베개)을 출간했다. 독도 연구자도 아닌 그가 1천여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독도문제 종합연구서를 선보였다. 시발점은 지난 2005년 미국립문서기록관리청의 ‘덜레스 문서철’에서 영국 외무성이 완성한 대일평화조약 초안(1951년)에 첨부된 지도를 발견하면서다. 지도발견에서 시작된 그의 연구여정이 끝내 묵직한 주제를 끌어 올렸다.

‘독도 1947’은 1947년을 기점으로 독도와 관련한 한국, 일본, 미국의 정책적 선택과 입장이 드러났고 이것이 1951년 샌프란시스코대일평화조약 체결로 귀결되기 까지 삼국의 정책적 견지가 형성되고 뒤바뀐 과정을 탐구한 결과물이다.

2005년 미국 '덜레스 문서철'에 사로잡히다

제목부터 정 교수가 가진 문제의식이 나타난다. “부제(전후 독도문제와 한·미·일 관계)가 사실은 실질적인 제목이라고 할 수 있다.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 체제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그 속에서 독도문제가 어떻게 다뤄졌으며 한국과 일본, 미국은 각각 어떤 입장이었는지 살폈다. 한국이 해방 이후 독도에 대한 정책적 입장을 갖게 된 시기가 1947년이다. 일본도 전후에 대일평화조약을 준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고, 미국은 1947년 대일평화조약 초안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한국은 1905년 을사늑약 이후 국가식민화 과정에서 일본의 불법 영토편입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경험을 계기로 완전 독립을 달성하기 전인 1947년 독도영유권을 수호하기 위한 본격적인 준비에 나섰다. 일본 외무성은 1945년 말부터 대일평화조약 준비작업에 착수해 1947년 조약과 관련한 내부준비를 완료했다. 일본 외무성이 같은해 6월 제작해 미국, 연합국에 배포한 팸플릿에는 독도와 울릉도를 ‘일본 부속도서’로 다뤘다. 

정 교수는 여기에 미국이란 제3자-그러나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를 끌어들인다. “전후 독도문제가 한·일간의 역사적 영유권 분쟁이 아닌 지역문제 성격이 강하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 특히 독도문제가 미국의 磁場 안에 있었으며, 미국의 영향력이 안고 있었던 陰地였음을 드러냈다.” 1947년 초반에 작성된 미 국무부의 다양한 초안들은 ‘리앙쿠르암’(독도)이 한국령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미국의 이러한 정책적 입장은 그러나 시볼드 당시 미 외교국장이 “독도는 일본령”이라고 주장하는 등 친일행보를 보이면서 갈팡질팡 했고, 이후 독도에 대한 미국의 정책적 입장은 시시각각 변했다.

정 교수는 “독도문제 저류에 흐르고 있는 것은 역시 미국이라고 하는 헤게모니였다”고 설명한다. “2차 세계대전 직후 대일평화조약이 체결됐다면 일본 입장에선 자신에게 불리한 조약이었겠지만, 1951년 이후 중국의 아시아 공산화, 유럽의 냉전, 한국전쟁이 발발한 가운데 미국은 조약초안을 일본에 보여주는 등 유례없고 실질적인 협상을 추진했다. 그 결과 샌프란시스코대일평화조약은 일본의 전쟁책임조차 명시되지 않은 간단한 조약이었다. 일본 영토를 명확히 표시하는 조문을 설정하지 않았고, 이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지도 역시 없었다.”

일본, '미국에 패던' 의식이 갈등 부추겨

독도문제를 한·미·일 삼국의 국제정치적 지역문제로 봐야한다는 결론을 이끌어내기까지 그는 20여개에 달하는 미국립문서기록관리청 문서상자를 뒤졌다. “2001년 방문했을 당시 1950년대 초 주한미대사관 문서철에서 독도, 평화선, 한일회담에 관한 문서를 보게 됐다. 한국에 비우호적이고 상당수의 내용이 문서철에서 빠져 있는 것을 보고 거슬리는 느낌이었다.” 이후 2005년 한국전쟁에 대한 책을 쓰기 위해 관리청을 다시 찾았을 때 독도와 관련한 문서를 찾게 됐다고 한다. 

책을 쓰는 일은 자료를 분석하고 정리하는 과정 자체였다. 정 교수는 “1947~1951년의 평화조약 문서철은 그야말로 방대했다. 국제법 용어도 그렇지만, 조약에 관계된 국가도 많고 조약을 만든 주체도, 성격도 여러번 바뀌었기 때문”이라며 “조약을 해석해 구획과 좌표를 설정하고 그 속에서 한국문제, 또 그 속에서 독도문제가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파악하는 일이 특히 어려운 작업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독도가 학계에서 그다지 권유하는 주제는 아니었다. 감정적으로 예민한 문제이기도 해서 걱정스럽기도 했다”고 말했다. 앞서 말했듯 정 교수는 독도 연구자도 아니고 관련 연구를 해 본 경험도 없다. 그런 그가 5년간 독도연구에 매달린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의 글에서 “연구자가 되겠다고 결심한 이후 역사적으로 중요한 주제에 대해 회피하지 않고 정면승부를 거는 것, 그것이 역사학자가 추구하는 바이자 소망하는 바라고 생각했다”라고 밝혔듯이 자료를 해석하는 역사학자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잊지 않았기 때문인 듯하다.

정 교수는 1947년 독도문제를 둘러싸고 세 나라가 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 각축전을 벌이는 과정에서 한국 외교정책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일본이 전후체제에서 한국이라는 구식민지를 대하는 태도가 독도문제를 통해 드러났다”며 “지금도 일본과 동아시아 국가가 갈등을 빚는 가장 큰 이유는 ‘일본은 중국이나 한국에 패한 것이 아니라 미국에 패전했다’는 일본의 인식 때문이다. 평화조약에서 배상결정조차 없었기 때문에 범죄의식도 없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정 교수가 앞으로 독도연구를 계속해 나갈 진 모르지만, 이번 책을 통해 그는 독도문제에 관한 새로운 인식과 향후 연구지점을 던져줬다는 데 의미를 찾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도는 분명히 ‘신선한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 책은 독도에 대한 얘기이지만, 이는 1950년대 동북아시아 질서·지역체제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한일관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좀 더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시야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정 교수는 2005년 독도가 일본령에서 배제돼 한국령으로 표시된 영국 외무성 대일평화조약 초반에 첨부된 지도를 발굴·소개해 당시 뉴스가 언론에 크게 보도된 바 있다.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몽양여운형평전』, 『우남 이승만 연구』등이 있다.『한국전쟁 : 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으로 제47회 한국출판문화상 저술상을 수상했다.

김유정 기자 jeo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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