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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들의 풍경] 지식과 글쓰기의 문제로 본 세 권의 문화비평서
[책들의 풍경] 지식과 글쓰기의 문제로 본 세 권의 문화비평서
  • 권희철 기자
  • 승인 2002.05.0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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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5-07 13:57:43
글쓰기가 문제라고 말한다. 논문으로 대표되는 학계의 글쓰기가 주된 표적이다. 꿈틀거리는 현실을 박제로 만드는 글쓰기. 여기에 여러 갈래로 나뉜 근대 분과학의 체계 아래서, 서로 알아들을 수 없는 자기들만의 암호들이 난무하게 된다. 사정이 이러니, 지식과 대중의 만남은 요원한 문제로 보이기까지 한다. 게다가 한국어로 글을 쓰지 못한다는, 아니 한국어로 생각하지 못한다는 비판도 거세다. 그런데 지식은 처음부터 글쓰기로 발화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나지 않았는가. 글쓰기는 지식의 유일한 표현수단이다. 때문에 지식과 글의 분리는 지식의 문제로 환원된다. 이렇듯 지식과 글쓰기는 영 화해할 수 없는 착잡한 지경에 이른 듯하다.

“무거운은 과정이고 가벼움은 목표다”

90년대 초엽부터 글쓰기에 대한 반성의 결과물들이 이어졌다. ‘문화비평’의 시도들은 대체로 기존의 지식을 반성하고 새로운 활로를 찾고자 하는 몸부림이었다. 하지만 이런 시도들이 또 다른 편향에 불과한 것은 아니냐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과장된 수사와 알맹이 없는 주장들만 난무하고 있다는 것. 요컨대 기존의 글쓰기가 무거움과 객관주의의 과잉이라면, 문화비평의 글쓰기는 가벼움과 주관적 감상의 남발이라 비판받는다. 이 점에서 볼 때 올해 간행된 김용석·진중권·이택광의 서적들은 남다른 측면이 있다. 그들은 단순히 문화현상 읽기에 그치지 않고 지식·글쓰기·현실의 문제를 풀어내고 있다.

그런데 ‘깊이와 넓이 4막 16장’(휴머니스트 刊)을 펴낸 철학자 김용석은 이성적인 것은 무겁고 감성적인 것은 가볍다는 경향을 꼬집는다. “무거움은 과정이고 가벼움은 목표다.” 이렇듯 김용석은 잘못된 상식을 비틀면서 자신의 주장을 펴나간다. “지난 몇 년 동안 우리 사회의 특징들 가운데 문화 변동적 차원에서 특별히 관심이 가는 것은 일종의 ‘가로지르기’라는 말로 대표될 수 있는 현상들이다. 그것은 이질적인 것들 사이의 소통·연계·통합을 추구함과 동시에, 그런 추구를 가능하게 하는 자유의 확보에 연관된 것이다.” 일단 그는 횡단의 중요성을 인정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에게는 수직적 관점에서, 세로의 관점에서, 즉 통시적 차원에서 다양성과 혼합성을 볼 필요도 있다.” 공시와 통시의 종합적 추구가 그의 철학적 뼈대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한 예로 ‘학제간 연구’를 들며, 허울좋은 외침 앞에 전제돼야 할 학문적 깊이의 부재를 지적한다. 물론 그는 세로와 가로라는 대칭적 표현을 경계한다. “세로지르기와 가로지르기는 서로를 풍요롭게 해줄 상승 변증의 관계에 있”다며 ‘십자지르기’를 내세운다.

이처럼 깊이와 넓이, 가로와 세로, 가벼움과 무거움의 상식적 견해를 비판하면서 두 마리 토끼를 거머쥐려 한다. 그런데 사실 구분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 그런 대칭을 너무 즐겨 쓰고 있는 건 아닐까. 기존의 철학의 문법을 벗어나려 하면서도 결코 벗어나지 못하는 무엇. 따라서 그의 책에 등장하는 유쾌한 텍스트들은 다시 무거운 비극의 주인공으로 둔갑하고 만다. 여기서 잠시 ‘가로지르기’라는 표현을 즐겨 썼던 철학자 이정우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가로지르기는 이것저것 많이 하는 것도 아니요, 여기저기 방황하는 것도 아니요, 특별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가로지르기의 정신은 우리에게 주어진 격자가 특정한 시대 특정한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 그 격자가 필연적이고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서 출발하며, 그런 격자에 저항하는 데서 출발한다.” ‘가로지르기’는 그 결과가 어땠건 하나의 저항이고 새로운 반역이었다. 지식을 뽐내지 않고 구체적인 언어에 생각을 담아내는 김용석의 글쓰기의 장점도 만만치 않지만, 무기 없이 가로와 세로의 접목을 꾀하는 시도는 너무나 평온하다.

반면 진중권의 ‘폭력과 상스러움’(푸른숲 刊)은 가볍고 경쾌하다. 그는 치고 빠지기를 즐겨하는 일종의 스타일리스트다. “벤야민은 철학자로서 아마 최초로 스타일의 문제를 의식한 사람일 게다. 현실의 문제들은 거기에 적절히 접근하는 데에 특정한 철학적 스타일을 요구한다. 여기서 ‘스타일’이란 그저 글의 바깥을 꾸미는 장식이 아니라 오로지 그것을 통해서만 드러나는 진리가 있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그는 자신의 스타일을 ‘광대의 스타일’로 비유한다. “철학의 광대들은 철학과 씨름한 게 아니라 철학을 갖고 즐겁게 놀았다. 모든 것이 너무 고상하고 정신적이어서 역겨운 시대에 철학은 광대가 되어 지저분한 장바닥에서 질펀하게 쌈박질하며 노는 게 낫다.”

제목부터 현란한 놀이다. 아도르노 ‘한줌의 도덕’을 ‘한줌의 부도덕’으로 바꾼 데 이어 지라르의 ‘폭력과 성스러움’을 괴상한 변주곡에 담았다. 그런데 진중권의 글쓰기는 ‘짜라투스트라가 말했다’에 등장하는 줄타기 광대처럼 위태로워 보일 때가 있다. 진중권은 거의 대체로 극단 사이의 경계를 택한다. 틈새를 공략하며 유희하는 글쓰기. 현실의 광경을 짐짓 관조하며 주사위놀이에 빠져있는 일종의 신이 되고자 한다. 허위와 위선의 가면을 쓴 보수주의는 주된 공략대상이다. 여기에 국한한다면, 글쓰기가 실천적인 무기로 진화하는 빼어난 현장을 목격하게 된다.

그런데 이택광은 ‘한국문화의 음란한 판타지’(갈무리 刊)에서 진중권에 대해 색다른 비판을 들려준다. “전투적 글쓰기는 기본적으로 이들의 글쓰기가 얼마나 이런 현실적 물화의 강제성을 넘어갈 수 있는가 하는 데 성패 여부가 달려 있다는 것이다. 형식은 고정적이지 않으며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럼에도 대중은 이 형식을 일종의 스타일로 받아들이면서” 진중권을 강제할 것이고 결국 “스타일의 신성화는 매너리즘의 복수로 돌아오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자신의 적조차도 포장을 해 팔 수 있는 위력을 가진 괴물이기 때문이다.” 광대의 줄타기는 상인이 벌인 난장의 도구에 불과하지 않은가.

담론에 대한 이택광의 정의. “나는 모든 담론이 현실 모순에 대한 상상적 해결책이라고 본다. 모순에 직면한 주체는 자신의 분열을 견디기 위해 통합적 이미지를 구성하려고 하는데, 그 결과물이 담론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여러 담론 비판이 수행된다. “특정 지식인의 사상적 입장은 결국 특정 리얼리티의 효과일 뿐이라는 관점”을 취했다는 것.

음란한 담론의 줄타기 벌이는 문화비평

그러나 그의 비판은 담론에 대해 담론을 주장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담론도 그 해석을 확장해 가다보면 결국 남는 것은 ‘밥그릇’이다. 한국에서 논쟁이 되지 않는 까닭도 정작 이 ‘밥그릇’ 문제를 꽁꽁 숨겨놓은 채 고담준론만을 논하는 척하는 지식인들의 기만성 때문이다.” 또 문화비평은 “원칙적으로 모든 보수주의에 대항하는 방법이다. 보수주의는 문화비평과 공존할 수 없는 적”이라고 말한다. 그는 한국의 ‘보수주의’를 ‘음란한 판타지’라고 부른다. 여기서 ‘음란’이란 리얼리티가 도착된 상황을 일컫는 것으로 해석된다. 책은 ‘음란한 판타지’에 대한 비판들로 묶여 있다. 어쩌면 오늘날 지식과 글쓰기의 단절은 음란한 담론의 줄 위에서 짐짓 뒷짐을 쥐고 있거나 화려한 연예인이 되고자 하는 광대들의 현시욕으로 착종되고 있는 게 아닐까.

권희철 기자 khc@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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