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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 문화과학 창간 10주년
[초점] : 문화과학 창간 10주년
  • 권희철 기자
  • 승인 2002.05.0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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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5-07 13:48:36

“사회구성의 세 기축인 문화와 정치와 경제를 서로 분리해 사고하는 관습을 깨고 그 셋의 상호교차 관계에 주목해 이론과 실천의 현장들을 횡단하고자 노력해왔다.” ‘과학적 문화이론’과 ‘진보적 문화정치’의 대명사 ‘문화과학’이 창간 10주년을 맞았다. ‘문화과학’의 10년이 의미 깊은 것은, 90년대라는 급격한 변동의 시기와 그 세월을 함께 했기 때문이다. 사실이건 아니건 우리는 90년대를 문화의 시대로 기억한다. 아울러 문화를 내걸고 명멸했던 여러 단체와 잡지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시대에 대한 비판을 수행해 왔다는 점, ‘문화과학’ 하면 떠오르는 독특한 이론적 뉘앙스를 구축했다는 점에서 이 계간지의 역사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단절’에서 시작하다

1992년 ‘문화과학’ 창간은 몇 가지 이론적 ‘단절’에서 비롯된다. 레이먼드 윌리엄스 류의 문화이론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과학적·유물론적’ 문화연구로 선회한다. 여기에 알튀세르, 르페브르 등의 그림자가 겹쳐진다. 이 역시 기존의 맑스주의와는 사뭇 다른 이론적 접근이었다. 창간 당시 “진보의 새로운 기획”이라 주장했던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한편 1991년 ‘신세대, 네 멋대로 해라’를 시작으로 점차 증가하기 시작한 문화비평은 문화담론의 유행을 만들기도 했다. ‘문화과학’도 간접적인 영향권 아래 있었을 것이다. 물론 ‘문화과학’은 초창기부터 이들 문화비평과 다른 길을 걸어왔다.

강내희 중앙대 교수(영문학)와 심광현 한예종 교수(미학)를 주축으로 해서 박거용 상명대 교수(영문학), 이득재 대구가톨릭대 교수(노문학), 문화평론가 이성욱 등이 가세하여 구성된 6명의 편집위원이 잡지를 창간했고, 이후 타 잡지에 비해 비교적 안정된 편집진을 유지해온 것으로 평가받았다. 편집진 교체가 거의 없었던 것이다. 이들은 한결같이 스스로를 ‘동인’에 가깝다고 말한다. 1991년 11월부터 매주 편집회의 겸 세미나를 가졌는데, 지금까지 대략 4백 50회 정도 진행했다고 한다. 1년에 평균 45회 이상 모임을 가졌다는 얘기다.

이들에 따르면, ‘문화과학’은 지금까지 크게 4번의 굴곡을 거쳐왔다. 첫 번째 시기인 1992년부터 1994년까지는 유물론적 시각에서 문화를 분석하고자 새로운 문제설정 방식을 모색했다. 언어·욕망·육체·공간 등의 문화 개념을 주로 다뤘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때 주목할 만한 점은 진보진영에서 다루지 않았던 푸코, 들뢰즈 등의 이론이 ‘문화과학’을 통해 소개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1995년부터 1998년 봄까지 두 번째 시기에서는 달라진 문화환경에 대해 분석하고 개입하기 시작한다. 또 서구 문화연구와 한국의 문화현실을 접목하고자 했다. ‘문화과학’의 이론적 생산기지 역할은 물론 젊은 연구자들의 활동공간이기도 한 ‘서울문화이론연구소‘가 만들어진 것도 이 때의 일이다.

1998년 간행된 14호부터 계간으로 전환하게 된다. 이 시기에 ‘문화공학’, ‘문화사회’ 등 새로운 개념을 창안했다. 당시만 해도 ‘문화과학’에 대한 주된 비판은 이론 편향이 아니냐는 질문이었다. 편집진은 새로운 개념들이 구체적 실천전략과 맞닿아 있는 만큼 이론 중심주의를 나름대로 극복한 것으로 자평하고 있다. 또 1999년 ‘문화연대’가 창립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2000년 여름부터 지금까지는 진보와 탈근대의 문제설정을 연결시키는 이론작업에 집중해 왔다. 한편 ‘욕망이란 문제설정?’, ‘문화사회를 위하여’(강내희), ‘필로시네마와 탈주의 철학’(이진경), ‘시각 이미지, 공간, 문화공학’(심광현) 등의 수록글은 연구자들 사이에서 널리 읽히기도 했다.

‘문화과학’은 창간 10주년을 맞아 ‘이데올로기와 욕망’이라는 주제로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고 있다. 이를테면 ‘사회구성체 논쟁’ 제2탄을 전개하는 게 이들의 목적이다. 맑스주의와 비맑스주의의 ‘절합’(articulation)이 그것. ‘절합’은 문의 지도리, 뼈의 관절로 쉽게 이해되는 개념이다. 이어짐과 끊어짐, 열림과 닫힘의 공존을 함축한다. 맑스주의와 비맑스주의 어느 것도 배제하지 않은 채 새로운 이론적 모색을 시작하겠다는 것으로 해석되는데, 이와 같은 문제의식은 지난 5월 4일 열린 창간 10주년 심포지엄 ‘이데올로기와 욕망: 즐거운 혁명이다!’에서 그대로 반영됐다. 이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는 지식인들과의 진지한 토론이 심포지엄 내내 이어졌다. 먼저 ‘혁명의 욕망, 욕망의 혁명’이란 글을 발표한 이진경 성공회대 강사(사회학)와 손호철 서강대 교수(정치학)가 서로 다른 입장으로 맞섰다. 이진경 박사는 이렇게 주장한다.

“혁명이란 의식화를 통해, 혹은 ‘대자화’를 통해, 혹은 진실을 아는 것에 의해, 진리를 의무로 삼는 것에 의해 이루어질 수 없다. 즉 혁명은 욕망 자체에 의거하며 특정한 욕망을 낳는 배치를 변혁하지 않고선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아니, 이게 더 정확하다. 혁명이란 욕망의 배치를 변환시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손호철 교수는 ‘배치환원론’ 더 나아가 ‘변형된 구조환원론’이 아닌가 물으며 “욕망이론은 현실과 분리된 ‘욕망의 관념론’으로 추락할 우려가 있다”고 지적한다.

자기복제와 동어반복에서 벗어나기

한편 ‘욕망의 정치와 이데올로기 비판의 절합’의 발표자 강내희 교수의 주장도 이진경 박사와 엇비슷하다. “진보세력이 힘을 가지려면 이데올로기 비판과 욕망의 실현이 동시에 가능한 국가를 구성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이데올로기 비판의식, 즉 국가를 경유하는 변혁노선은 포기할 수 없다. 하지만 단서가 있다. 이 노선이 성공하려면 욕망의 정치를 내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토론자로 나선 윤수종 전남대 교수(사회학)는 “어쨌든 욕망과 이데올로기의 절합, 정말 행복한 결혼이 될 수 있을까”라고 운을 뗀 뒤, 강 교수의 주장에 대해 “이 지점에서는 불행한 결혼이 될 것 같은 확신이 선다. 자율주의자들은 국가사멸을 지향한다”고 맞섰다. ‘제국’의 저자 네그리와 하트에 대한 해석이 서로 엇갈린 것으로 풀이된다.

이처럼 심포지엄 곳곳에서 서로 다른 해석과 입장이 팽팽한 맞서는 등 지적 긴장감이 엿볼 수 있었다. ‘문화과학’의 도전적 문제의식에 대해 향후 비판적 입장을 가진 지식인들의 반응이 주목되는데, 여기서는 무엇보다 ‘문화과학’이 배타적 집단성에서 벗어나는 일이 중요해 보인다. 같은 입장을 견지하는 모임만으로 자족한다면, 생산적 논쟁이 불가능할 뿐더러 자기복제와 동어반복의 함정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문화과학’이 구체적인 ‘절합’을 실천하기를 기대한다.
권희철 기자 khc@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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