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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파식적] : 꽃방석 깔아줘도 가지 않을 가시밭 길
[만파식적] : 꽃방석 깔아줘도 가지 않을 가시밭 길
  • 교수신문
  • 승인 2002.05.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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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5-07 13:42:54
김성은 / 서울신학대·기독교교육과

모세의 기적처럼 바닷물이 갈라져 바다에 길이 생긴다는 진도를 보러 갔었다. 그런데, 본래 목적이었던 신비의 바닷길보다 더 감동을 받은 것은, 그 곳 출신의 수필가가 정성껏 설명하면서 안내해준 진도, 땅 끝 마을 해남, 강진, 벌교, 정읍의 역사였다. 고려 때 원의 침략에 끝까지 투쟁한 삼별초의 흔적과, 임진왜란 때 왜구와 싸운 이순신 장군의 승전이며 동학, 항일 독립운동, 여수 순천사건, 지리산 빨치산 등 우리민족의 시대적 아픔을 담은 이야기들이다.
우리 역사를 기억하는 과거로의 여행에 아픔을 더한 것은 일행 가운데 나이 든 몇 분의 상반되는 이야기들이다. 평안도 출신 65세 남자는 중학생 때 공산당들이 목사 아버지를 개 끌듯 끌고 가 총살하는 장면을 잊을 수 없고, 북한 공산당을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고 했다.
비슷한 나이의 전라도 출신 남자의 사연은 다르다. 밤이면 빨치산이 내려오고 낮이면 경찰과 토벌군이 찾아와 괴롭히던 시절, 어느 날 마을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를 공산당이라며 죽였단다. 온전한 신체 부분을 찾을 수 없어 나무토막 하나 넣어 무덤을 만들어 놓고 그 마을을 떠난 뒤 22년 동안 한 번도 고향을 찾지 않았다고 한다.
이북에서 내려와 지난 학기 은퇴한 한 교수의 사연도 기막히다. 아버지가 공산당에게 끌려 총살 장소로 가던 중, 동네 어른이 작은 소동을 피워 시선을 돌리게 한 후 자기가 쓰고 있던 밀짚모자를 씌우고 구덩이에 밀어 넣어 죽음을 면했다는 것이다.
대학시절 민주화 투쟁으로 여러 번 옥살이를 한 30대는 아버지가 빨갱이에게 협력했다는 것 때문에, 잡혀가기만 하면 본인의 행위와는 상관없이 심한 고문을 받아서 죽은 아버지를 원망했다고 한다.
너무 많은 이야기를 듣고 돌아오는 길에 들른 휴게소 텔레비전에서 금강산 이산가족 상봉 장면을 보았다. 50년만에 가족을 만나러 금강산 가는 이들에게는 그 길이 바로 기적의 바닷길일 것이다. 이제 다 늙어서 혼자 걷지 못하고 휠체어에 앉아 상봉장소로 들어가는 할머니들을 보면서 그들이 너무나도 오래 기다렸다는 게 죄송했다. 가족을 만난 사람들이 “이렇게 살아 있어줘서 고맙다”라고 인사하는데, 아직도 한편에서는 ‘주적론’이니 ‘상호주의론’이니 남북문제에 제동을 걸어 이산 가족 상봉을 지체시킨다니 말이 안 된다.
‘수절 할머니 52년만의 바가지’라는 제목의 신문기사는 애틋하기보다 가슴을 찌르는 통증을 느끼게 한다. 1944년에 결혼해 신랑 나이 22세 각시 나이 23세에 아기도 낳지 못하고 헤어져 이제 52년만에 만나보니 신랑은 재혼하여 5남매를 두었단다. 그 할머니는 “불쌍한 시어머니를 두고 어떻게 다른 집에 가느냐”고 했다. 안 돌아올지도 모를 한 남자를 기다리며 그 남자가 두고 간 다른 여인, 시어머니를 모시고 그 긴 세월을 살아왔다니. 그 삶을 그 할머니는 “가시밭길도 그런 가시밭길은 없어라우, 꽃방석 깔아줘도 가지 않을 길을 훠이훠이 걸어 왔는디”라고 표현했다. 가시밭길을 훠이훠이 걸어간 할머니의 청춘과 앞서 네 분의 이야기는 우리 남과 북이 함께 겪은 아픔일 것이다.
삼별초가 원에 대항하던 성벽을 구경하는데 그 성벽 높은 곳 돌 사이로 늘어진 노오란 들꽃 한 송이가 이 할머니의 삶 같다. 어찌 그 작은 씨앗 하나 놓을 곳 못 찾아 그 높은 데서 꽃 한 송이 피웠단 말인가. 머나먼 고향 땅을 두고 온 원나라 병사의 눈물, 제 땅 제 처자식 하나 지키지 못해 비분에 떠는 고려청년의 통탄, 같은 마을 친구 적이라 죽이고 죽여야 했던 한반도 젊은이들 원한의 눈물방울 모두 모여 이 꽃 한 송이 성벽에 피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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