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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GO칼럼]호주제, 전근대적 부계혈통제 생명, 도덕원리에 위배
[NGO칼럼]호주제, 전근대적 부계혈통제 생명, 도덕원리에 위배
  • 교수신문
  • 승인 2000.12.1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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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12-18 11:40:58
고은광순/호주제폐지를 위한 시민의 모임, 운영위원


어느 법학과 교수님에게 이런 말씀을 들은 적이 있다. “법학을 하는 사람들도 호주제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는 대개 다 알지요. 그런데 어떤 남자 교수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틀린 주장이 아닌 줄은 알지만 만약 그런 주장을 하는 여자가 앞에 있다면 멱살을 잡고 싶다고 말이지요. 다들 집에서 ‘가문을 빛낸 존재’들로 인정받고 살았을 터이니 가부장제에 대한 불만이 어디 그렇게 많이 있겠습니까.”
호주제에 관해 방송국에서 여러 차례 부딪힌 바 있는 호주제 존치론자가 방송을 끝내고 나오며 나에게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주변에서 왜 자꾸 그런 프로그램에 불려다니며 애를 쓰느냐고 말합니다. 총 한방이면 해결될 거 아니냐고 그러지요.” 그뿐인가. 정부가 주최하는 공식 토론장에 나와 호주제 존치를 주장하던 어떤 교수는 호주제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능지처참을 해야 한다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기도 한다. 자기와 다른 주장을 한다고 해서 이렇게 극단적인 증오를 품을 수 있는 그들이 목숨을 걸고 사수하고자 하는 호주제란 도대체 무엇인가.
어느 나라나 자기나라 국민임을 증명하는 신분등기제도가 있다. 호적은 이러한 신분등기를 집, 가족단위로 기록하는 신분등기를 말하며 여럿이 함께 묶여있으므로 색인자가 필요하게 되고 이를 호주라 부르는데 이 호주를 남자 중심으로 정해 놓음으로써 사망, 결혼, 출생 등으로 가족간의 신분행위의 변동이 생길 때마다 여성에게는 불리한 일들이 다양하게 발생하게 된다.
결혼시 여성은 남성, 혹은 시아버지의 호적에 일방적으로 편입되기를 강제당하고(夫家入籍) 자녀는 아버지의 호적에 속해야 하므로(父家入籍) 이혼후 자녀를 양육하는 여성은 자녀와 한 호적에 있을 수 없다. 호주승계에 있어서 여성은 자식이나 손자는 물론이고 남편이 바람피워 낳아 임의로 호적에 올린 자식들보다도 뒤로 처짐으로써 결혼과 더불어 여성의 정체성은 법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부정당하며 모든 남성은 여성보다 우월하다는 법감정이 대량생산되어왔다.
조선 후기 주자학이 강화되면서 중국 황실의 가부장적인 宗法制가 조선왕조에 유입되었고 거기에 일본이 식민지배를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자국의 호주제를 그대로 이식한 것이 현행 호주제의 뿌리가 되었으므로 호주제는 우리의 전통일 수 없다. 더욱이 남자만 씨앗을 생산하며 아들을 통해 대를 잇는다는 발상의 부계혈통제는 앞서가는 나라에서는 허용하지 않는 전근대적인 제도이다. 여성을 도구로 정의하지 않고는 성립할 수 없는 부계혈통제는 생물학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올바르지 못하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국에만 이러한 가부장적 부계혈통제가 제도적으로 뒷받침되어 유지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성을 수단으로 전제하지 않고는 성립할 수 없는 남성중심의 수직문화인 족보, 가문, 대잇기, 종중행사 등이 권력을 가진 거짓말 놀음에 불과하다는 것을 지식인들은 진정 깨닫지 못했거나 아니면 알고서도 눈감아왔기 때문은 아닐까.
1997년 3월 8일 여성대회에서 선언된 부모성함께쓰기운동은 이러한 부계혈통제에 대한 딴지걸기로 시작돼다. 이어 1998년 11월에 출범한 호주제폐지를위한시민의모임과 1백30여 개의 시민단체가 함께 어울려 2000년 9월에 발족한 호주제폐지를위한시민연대는 국회입법청원과 헌법소송을 통해 이러한 부계혈통적 가부장제에 대한 지속적인 공격을 꾀하고 있으며 이는 UN을 비롯한 세계 여성운동단체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우주가 공들여 피운 생명의 꽃인 인간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소중한 생명의 대를 잇고 있다. 누가 감히 남자만 대를 잇는다고 말하는가. 호주제를 비롯해 부계혈통제는 우리가 목숨을 걸고 사수해야할 것이 아니다. 이제 한국에도 바야흐로 양성평등의 싱그러운 바람이 불게 될 것이며 한국사회의 에너지는 한결 커질 것이다.
koeunks@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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