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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여성 강렬하게 등장시켜 남아있는 작품 진위문제도 심각
일하는 여성 강렬하게 등장시켜 남아있는 작품 진위문제도 심각
  • 윤범모 경원대·미술사학
  • 승인 2010.07.26 13: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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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계에서 본 나혜석 작품의 논쟁점

晶月 나혜석은 20세기 전반부 식민지 조선에서 불꽃처럼 살다간 선구자이다. 당시 나혜석의 활동상황은 그대로 언론에 보도될 만큼 대중의 관심사였다. 때문인지 그에 대한 기록은 비교적 많은 편이다. 더불어 『나혜석전집』으로 묶일 만큼 나혜석 스스로 발표한 글의 분량 역시 적지 않다. 발언하는 여성으로서의 나혜석, 그는 자신의 생애를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18세부터 20년간을 두고 어지간히 남의 입에 오르내렸다. 즉 우등 1등 졸업사건, M과의 연애사건, 그와 사별 후 발광 사건, 다시 K와 연애 사건, 결혼 사건, 외교관 부인으로서의 활약 사건, 황옥 사건, 구미 漫遊 사건, 이혼 사건, 이혼고백장 발표 사건, 고소 사건, 이렇게 별별 것을 다 겪었다.”(「신생활에 들면서」, 1935)

「이혼고백서」 발표 후 찍힌 낙인 

졸업과 결혼 같은 것은, 심지어 이혼까지도, 한 생애의 보편적 통과의례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나혜석의 경우는 유별난 부분이 있어 으레 언론에 보도되면서 대중의 관심을 끌었다. 때문인지 나혜석은 자신의 생애를 사건의 연속으로 정리했는지 모른다. 연애사건, 발광사건, 결혼사건, 이혼사건 등등 사건의 연속, ‘사건’은 나혜석의 생애를 상징하는 개념이다.

 사건의 주인공, 나혜석은 봉건적 가부장제도의 사회에서 여성의 입지를 쟁취하고자 현장에서 활동 했다. 그런 과정에서 파격으로서 돌출 행동이 나오기도 했다. 개방과 자유를 마음껏 구가하는 21세기의 오늘에도 실현하기 어려운 파격이다. 파격은 나혜석 생애의 단골 개념이었다. 물론 나혜석은 발언으로만 그친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옮겼다는 데에 커다란 의미가 있다. 발언과 더불어 행동하는 여성, 이는 나혜석의 표상이다. 그는 가시밭길도 누군가 걸어가야 길이 생긴다면서 선구자 정신을 강조했다.

나혜석은 1923년 임신과 출산 과정을 진솔하게 기술한 글을 발표했다. 이를 두고 남성 독자는 비판의 칼을 들었다. 남성본위 사회에 여성의 발언은 수용하기 어렵다는 반증이리라. 세계일주 여행길의 파리에서 나혜석은 독립운동가 33인 가운데 하나였던 최린과 염문을 날렸다. 원인 제공자인 최린과의 사건은 이혼으로 이어졌고, 나혜석은 결혼생활의 자초지종을 「이혼고백서」라는 제목으로 잡지에 연재 했다. 진솔한 고백, 파격이었다. 아니, 한걸음 더 나간 파격은 최린을 상대로 정조유린에 대한 청구소송이라는 법정투쟁이었다.

평생 후원자였던 오빠 나경석으로부터 분노를 자초하기도 했던 사건, 하지만 나혜석은 줄기차게 여성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내세웠고, 이는 곧 가부장사회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다. 사실 성녀와 마녀는 종이 한 장 차이이다. 프랑스의 聖女 잔 다르크는 원래 魔女로 처형당한 여자였다. 오늘날 잔 다르크는 마녀에서 성녀로 바뀌어 추앙 받고 있다. 하지만 ‘탕녀 나혜석’의 길은 멀고도 멀다. 최근 5만 원 권 지폐의 여성인물 후보 가운데 하나였던 나혜석, 비록 여성운동가들이 반대했던 왕조시대의 ‘현모양처’가 선정될지언정 나혜석은 지폐의 주인공이 될 수 없었다. 정말 갈 길이 멀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 ‘우리 시대의 사건’이었다. 

화가로서의 나혜석은 최초의 여성 유화가라는 점 외에 근대 최초의 전업작가란 측면을 강조하게 한다. 1910년대 출현한 남성 유화가들이 한결같이 붓을 꺾었음에도 불구하고 나혜석은 작품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 그는 조선미전에 18점의 작품을 출품했다. 비록 소품 2백점을 포함하고 있지만 평생 3백점 가량의 작품을 발표했다. 일제 강점 하 그 어떤 화가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본격적이고도 열성적인 작가활동을 보였던 것이다. 1920년대 초기의 작품을 보면 동시대의 남성 화가들과 다른 차별상을 그림에 담았다. 풍경화라 하더라도 전면에 일하는 여성을 강조했고, 세시풍속 드로잉도 여성 중심으로 풍속을 해석했다. 문제는 오늘날의 현실이다.

현재 30~40점 정도가 나혜석 작품이라고 주장되면서, 미술관에 걸려 있거나(국립현대미술관에 걸려 있는 <무희> 역시 필자는 나혜석의 진품이라고 보지 않는다), 화랑가에서 거래되고 있거나(경매에 가짜 그림이 나와 무리를 빚기도 했다), 도록에 소개되고 있다(너무나 심각한 수준이다). 하지만 출처가 확실한 작품은 단 한 점도 없다. 도록이 남아 있는 조선미전 출품작을 비롯해 이른바 ‘족보’를 알려주는 작품은 남아 있지 않다. 물론 나혜석 작품으로 주장되는 현존 작품의 진위문제는 시급히 해결해야할 과제로 미술계에 남아 있다. 화가로서의 나혜석은 이렇듯 불리한 처지에 있다. 한때 나혜석의 대표작으로 꼽혔던 <나부>조차 지금은 위작의 혐의를 받고 있을 정도다. 무엇 때문에 나혜석의 진품은 보기 어려울까. 이른바 탕녀 지우기의 사회적 분위기와 연결된 일일까. 아무리 전쟁을 겪은 사회라 하지만 나혜석의 작품은 몽땅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왕성한 활동에도 남아있는 작품 없어 

정조는 취미라고 주장할 만큼 나혜석은 급진적 사상의 소유자였다. 이 같은 정조 취미론은 남성사회에서 무참하게 돌팔매를 당했지만, 질곡의 사회에서 그의 주장은 돋보일 수밖에 없었다. 일제 식민지의 후반기, 나혜석은 사회활동을 접고 非僧非俗의 생활을 하면서 예술을 방기하지 않았다. 나혜석과 깊은 관계가 있었던 이광수, 김우영, 최린, 이들의 공통점은 해방 이후 반민족행위자로 법정에 섰던 대표적 친일파라는 점이다.

친일의 대열에서 거리를 두고 정신적 지조를 지켰던 나혜석, 그에게 누가 돌팔매를 던질 것인가. 평생 예술세계를 지키기 위해 희생을 각오했던 선각 여성, 나혜석이 화필을 버리지 않고 작품제작을 실현한 사실만 가지고도 초기 페미니즘의 역사를 기술할 정도의 의의를 살피게 한다. 돌출과 사건의 주인공일지라도 나혜석이 지키고자한 것은 바로 예술이었고 또 자유였다. 후반부의 인생에서 비록 좌초를 당했지만 정신세계만큼은 타협하거나 훼절하지 않았다. 이광수와 비교하면, 이 점 더욱 돋보이는 부분이 아닌가 한다. 나혜석은 여성으로서, 화가로서, 하나의 거울과 같은 역할을 역사에 남긴 선각 여성이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으리라.

윤범모  경원대·미술사학

필자는 동국대에서 박사를 했다. 논문으로는 「일제하 조소예술의 역사적 전개와 특성」, 저서로는 『화가 나혜석』, 『김복진 연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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