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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윤리·국어’ 등 개념에서 근대성의 뿌리를 읽다
‘철학·윤리·국어’ 등 개념에서 근대성의 뿌리를 읽다
  • 황수영 한림대 한림과학원·철학
  • 승인 2010.07.26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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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대회 강평기] 서울대 인문학연구원·한림대 한림과학원 공동 국제학술대회 ‘동아시아 문명의 근대적 전환’

2010년 7월 9일과 10일 양일간에 걸쳐 서울대 신양학술관에서 동대학의 인문학연구원과 한림대 한림과학원 공동주최로 국제학술대회 ‘동아시아 문명의 근대적 전환 : 개념의 번역과 창조’가 열렸다. 이 중후한 제목에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것은 ‘개념’이란 단어이다. 역사를 이야기로 서술하는 데 우리는 이미 익숙하다. 사상사, 정치사, 문화사 등 개별 영역을 특징짓는 단어에 ‘史’를 붙이면 기존의 지적 습관에 기대어 그런대로 이해가 가능하다.

하지만 개념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이와는 사뭇 다르다. 개념은 수입되거나 창조되고 유통되는 도구적 과정에 그치지 않고 한 시대를 형성하는 자기규정적 요소로 기능한다. 그러므로 동아시아 문명의 근대적 전환을 바로 보기 위해 개념에서 출발하는 것은 한림과학원 김용구 원장의 인사말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동아시아의 근대성을 그 뿌리에서부터 사유하겠다는 의지와 맞물려 있다.

유학적 개념 서구사상적 잣대로 판단

이 학술대회는 개념으로 동아시아의 근대를 다시 사유하기라는 목적에 맞게 상당히 일관된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먼저 ‘철학과 윤리’라는 첫 번째 세션에서는 근대학문의 기초적인 개념들의 유입과 번역 과정에서 일어나는 의미의 충돌과 동화, 창조를 다룬다. 이행훈 한림과학원 교수는 「전통 학문의 굴절과 한국 근대 ‘철학’의 발생」에서 기존의 유학적 개념들이 서구사상의 잣대로 판단되는 과정을 ‘서구라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위에 눕혀진 상황에 비유하고 있다. 요아힘 크루츠 독일 하이델베르크대 교수는 칸트의 ‘물자체(Ding an sich)’ 개념이 중국에서 수용돼 오해 혹은 자의적 해석을 거쳐 궁극적으로 현재의 의미로 정착되기까지의 복잡다단한 과정을 세심하게 보여준다.

이혜경 교수는 「근대 동아시아 윤리개념의 번역과 유통 - 유학과의 관계를 중심으로」에서 근대 유럽의 과학으로서의 윤리학과 ‘수신, 인륜도덕’과 같은 동양의 도덕이 충돌하면서 윤리 개념이 독자적 의미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삼국에서 공히 국가주의에 봉사하는 개념으로 변질된다는 단호한 결론을 내린다. 두 번째 세션인 ‘인종과 종교’는 더욱 예민한 주제이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는 근대 한국의 인종 담론이 아시아연대라는 일본의 이데올로기의 영향으로부터 시작해 식민통치 이후에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로 공고해져가는 굴곡을 보여준다.

이경구 한림과학원 교수는 근대 한국이 중화주의를 벗어나 서구문명에 대면하는 과정에서 일본, 중국과 달리 기독교를 서양문명의 정수로 수용하는 독특한 상황을 분석한다. 쑨장 일본 시즈오카대 교수는 서양선교사들과 동아시아 지식인들의 종교 개념에 대한 상이한 이해가 맞부딪히는 상황을 잘 보여준다.

잠의 은유가 보여주는 언어횡단

세 번째 세션인 ‘국가와 국어’ 역시 철학이나 윤리, 종교 등의 개념들이 주는 무게에 못지  않게 심각한 주제인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실제 개념들을 둘러싼 실타래를 풀어나가는 세 발표자의 방식은 좀 독특한 데가 있다. 이연숙 히토츠바시대 교수는 일본어를 ‘국어’라고 부름으로써 일어나는 의미의 절대주관화로부터 사물을 왜곡시키는 ‘결함투성이의 시각장치’를 본다.

임경화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교수는 「소리를 둘러싼 항쟁 : 식민지 조선에서의 창가, 민요 개념 성립사」에서 애국 창가로 ‘소리를 규합하는 근대’에서 감성적 영역의 개념화에 미친 근대의 세부적 구성 과정을 목격하게 해준다.

개념으로 근대 이해하기에서 가장 독특한 연구는 아마도 루돌프 바그너 독일 하이델베르크대 교수의 「잠들어있는 중국, 깨어나는 중국」일 것이다. 제목이 암시하듯이 발표자는 몸, 배, 무대, 섬, 집, 동물 형상 등으로 나타나는 은유로서의 국가에 천착하고 있다. 그는 ‘국가’에 대해 유일하고 변치 않는 정의를 내리는 데는 관심이 없으며 오히려 그 ‘구조와 역동성을 이해하고, 그것을 조정하고 변화시키고 폐기하기 위한 전략을 개발하기 위해 세계 도처에서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를 연구한다.

19세기 후반부터 10년 동안 중국 신문의 정치만화, 소설, 삽화에서 중국은 종종 잠자는 거인, 잠자는 사자 등으로 그려졌다. 문자이미지와 시각이미지가 상호작용하는 잠의 은유는 다양한 언어사용자들에서 동일하게 이용된다는 면에서 언어횡단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은유는 물론 ‘동포여, 깨어나라’와 같은 대칭적 은유와 동시에 사용된다.

엄청난 잠재력을 가진 거대한 동물, 중국이 각성하면 전 세계가 두려워하게 될 것이라는 암시를 가진 이 은유는 영국과 프랑스와 같은 유럽 국가들에서도 똑같이 등장했다. 동물의 비유는 당시의 사회진화론적 현실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실 은유는 개념과 달리 이해하기 위해 어려운 노력을 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역사의 격동기에 다급한 현실진단을 위해 문화횡단적이고 언어횡단적인 은유, 상징, 알레고리적 언설의 무기고가 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국가의 경우 은유와 이미지에서 표현되는 유기적 통일체 개념이 유기체적 국가론에 선행하며 이에 대한 개념틀을 제공한 것이다. 앞서 쿠르츠 교수는 한 용어가 대체적인 합의에 이르기 전에 일어나는 수용 초기의 역동적 다의성이야말로 당대의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징후적 기능’이라는 점을 강조했는데 사실 이러한 다의성은 개념보다는 그것이 가진 상징적 기능에서 나온다. 개념은 은유의 설득력이 어느 정도의 합의에 이르게 되면 고정된 의미를 갖게 된다. 개념의 창조와 번역, 유통이 갖는 역동성은 바로 은유와의 상관관계에서 나오는 것이다.

동아시아 근대를 바로 보는 일이 왜 필요한가. 바로 우리는 근대의 자식들이기 때문이 아닐까. 근대에 형성된 개념들은 이미 사어가 된 것들도 있지만 많은 경우 여전히 우리의 삶을 규정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어느 때보다 더 노골적인 은유와 알레고리의 홍수 속에서 길을 잃곤 한다. 이것들의 뿌리를 캐보는 일은 그래서 더욱 절실하다.

황수영 한림대 한림과학원·철학

필자는 프랑스 파리 4대학에서 박사를 했다. 논문으로는 「철학과 인문학, 개념적 상호작용의 역사」, 저서로는 『근현대 프랑스 철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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