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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설고 기이한 가능성의 교차점
낯설고 기이한 가능성의 교차점
  • 홍지석 객원기자·미술평론가
  • 승인 2010.07.19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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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비평] 미술과 언어가 만났을 때

주재환, 「인정과 낭만의 외상주점, 사직동 대머리집」, 2010, 84X60cm, 원본외상장부 확대프린트, 형광펜
모든 억압됐던 것의 복귀가 그렇듯 최근 회화에서 발견되는 언어적 양상은 어떤 낯설고 기이한 성격을 갖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회화를 포함해 현대미술 전체에서 두루 발견된다. 최근 국내에서 진행됐거나 진행 중인 몇몇 미술 전시들은 현대미술에 나타나는 언어와 미술의 낯설고 기이한 관계를 조명하고 있어 주목된다.


‘시각예술에서 언어가 무엇을 의미하는가의 문제를 탐구한다’는 주제로 성곡미술관에서 열렸던 ‘언어놀이’展(6월 18일~7월 18일)이 그 대표적 사례다. 우리 현대미술에서 언어와 미술의 관계를 탐색했던 주요 작가들을 대부분 망라한 이 전시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미술의 언어성이 아니라 언어의 미술성을 강조해낸 작가들이다. 예컨대 우리는 여러 나라들의 서로 다르게 생긴 단어들로 쓴 시를 마주 대한다(양주혜). 우리말이나 영어, 일본어 단어의 의미를 언어 차원에서 파악하는 독자들은 많을 것이다. 하지만 스페인어나 아랍어 단어라면 사정이 다르다. 우리는 그것을 그저 그림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 이렇게 글과 그림으로 혼합된 시의 의미를 헤아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말라르메처럼 한 단어로부터 중요한 자음이나 모음을 의도적으로 탈락시킨 차학경의 경우는 어떤가. 그 공백을 우리는 동양화의 여백처럼 바라보게 될 것이다. 그런가하면 문자로 가득 채워진 인쇄물을 큰 벽면에 가득채운 주재환의 작품에서 우리는 문자의 의미를 헤아리지 않는다. 그저 문자들이 서로 얽혀 만들어내는 선들의 배열이나 얼룩을 바라볼 따름이다. 그것은 작가의 바람일 수 있다. 그 인쇄물이란 외상장부이기 때문이다. 


만 레이 「레이오그램」_ 17.5×12.5cm_퐁피두센터_1923~25
지금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만 레이와 그의 친구들’展(6월 16일~8월 15일) 또한 미술과 언어의 차원에서 헤아려 볼 수 있다. 만 레이는 초현실주의 사진가다. 그는 일평생 자신의 사진 작업을 통해 의식적으로 파악되는 언어적 의미에 도전한 작가다. 예컨대 그의 레이오그램 작품들은 감광지 위에 다양한 사물이나 물체를 올려놓아 제작한 카메라없는 사진이다. 이 종이는 빛(들)에 노출되어 변한다. 하지만 이렇게 붓과 물감 없이 빛으로 만든 이미지는 그 어떤 것보다 생생하고 현실적이다. 또한 우리는 이 전시에서 아름다운 여인의 등을 바이올린처럼 보이게 해 여인이면서 동시에 바이올린인 어느 한 단어로 정박시키기 불가능한 이미지-그의 대표작 「앵그르의 바이올린」을 감상할 기회도 갖게 된다. 


이렇게 현대미술이 언어를 끌어들여 새롭게 우리 앞에 제시하는 이미지는 전통적인 미술도 전통적인 언어도 아닌 또 다른 어떤 것이다. 우리 앞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 언어와 미술을 상호공존으로 이끄는 길과 언어와 미술을 상호파괴로 이끄는 길이다. 어떤 의미에서 현대미술은 이 두 가지 가능성이 모두 열린 교차점에 서 있다.

홍지석 객원기자·미술평론가 kunst75@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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