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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세가가 꿈꾼 백년대계 … 島山·南岡 등에게서 영향 받아
경세가가 꿈꾼 백년대계 … 島山·南岡 등에게서 영향 받아
  • 한용진 고려대·교육학
  • 승인 2010.07.05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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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의 교육입국 理想

<동아일보> 창간 무렵의 김성수
사진제공: 인촌기념회
근대 백년의 한국 지성사 속에서 인촌 김성수를 다시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한마디로 줄여 말하면, ‘우국경세가의 백년대계’가 요구되는 시기이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전통시대의 큰 공부[大學]가 治國平天下의 교육이었다면, 21세기 대학인들의 공부는 세계화주의자인 토마스 프리드먼(T.L. Friedman)이 말하는 ‘대체할 수 없는 사람’으로서 개인 역량을 강화하는 교육처럼 보인다. 예전에 의대나 법대에 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대학진학의 동기를 물으면 ‘돈 없고 아픈 사람 혹은 힘없고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기 위해’란 고상한 명분이 있었지만, 요즘에는 이런 동기를 말하는 젊은이를 찾아보기 어렵다. 대학에서 더 이상 널리 인간세상을 이롭게 하려는 큰 그릇의 경세가를 키워내기 보다는, 자기와 자기 주변의 개인적이고 현세적인 삶에 탐닉하는 것을 당연시 하는 시대 풍조가 김성수를 다시 주목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그의 삶과 사상의 현대적 의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敎育立國의 理想

인촌 김성수는 인생의 황금기인 20대에서 50대 중반까지 35년을 일제 강점 하의 한반도에서 살아가면서도, 민족의 독립과 근대적 국가 건설의 꿈을 잃지 않고 이를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 서울대 명예교수를 지낸 한기언은 인촌의 활동과 업적을 정리해 ‘敎育立國의 理想’이라고 했다. 교육입국이란 개인을 도구화하는 국가주의적 교육이기보다 올바른 가치관을 가진 인재 양성의 교육을 통해 나라를 바로 세운다는 뜻이라 할 수 있다. 그가 20대에 중앙학교를 인수하고, 30대에 <동아일보>와 경성방직주식회사를, 40대에는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고 광복 후 고려대로 발전시킨 것이나, 50대에 한국민주당을 결성하고, 60대에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에 취임하는 등 ‘교육, 언론, 산업, 정치’의 삶에서 시종일관하는 것은 바로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한 교육 사업의 일환이었다.

1908년에 김성수는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가출해 일본 유학의 길을 떠나게 됐다. 그가 공부한 와세다대는 1881년 이토 히로부미와의 정쟁에서 물러난 오쿠마 시게노부가 세운 대학으로, 재야정신과 반골정신이 투철한 대학으로 유명했다. 마침 김성수가 와세다대를 다닌 1910년부터 1914년까지 오쿠마는 와세다대 총장으로 재임했다. 김성수는 오쿠마 총장에 대해, ‘나는 그로부터 사상과 학식을 본받기보다 먼저 세상을 위해 眷眷一念을 잃지 않는 그 憂國經世家로서의 志操에 많은 존경과 仰慕를 가졌다’고 회상한 바 있다. 교육자로서 김성수의 인간형성에 큰 의미를 지닌 인물로, 한기언은 도산 안창호, 의암 손병희, 남강 이승훈 등 민족의 큰 스승을 나열하고 있다. 이들 모두 나라를 걱정하고 세상을 경영하는 우국경세가들이었으며, 교육에 뜻을 세운 사람들이었다는 점은 교육이야말로 진정으로 세상을 바꾸는 힘의 원천임을 의미한다. 큰 인물과의 만남은 교육적으로 무척 중요한 문제다. 만일 현대인에게 존경할 만한 偉人이 사라지고 있다면, 이는 개인적으로 안타까운 일일 뿐만 아니라 시대의 불행이기도 하다.

道戰으로서의 敎育

국가 백년을 내다보는 큰 계획으로서 교육은 교육입국을 위한 挑戰이자, 道戰이다. 천도교의 3대 교주인 손병희가 三戰論에서 주장한 道戰은 財戰, 言戰과 함께 ‘무기로 싸우는 것보다 더 강하고 무서운 방안이며, 보국안민과 평천하의 계책’이었다. 즉 세계 각국이 문명의 도를 지켜 백성을 안보하고 직업을 가르쳐서 그 나라로 하여금 태산같이 안전하게 하는 데 교육의 역할이 있다는 것이다. 도산 안창호도 민족의 부흥을 위해 ‘교육, 산업, 출판을 통한 항일정신’을 주장했는데 이 역시 교육의 중요성을 첫 번째로 꼽고 있다. 인촌 김성수의 삶에서 볼 수 있는 교육과 산업, 언론 등의 사업은 바로 도전, 재전, 언전이라는 삼전론의 다른 표현이며, 사람들이 화목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하는 ‘도전으로서의 교육활동’은 언제나 가장 중요시 되는 활동이었다.

그렇다면 교육을 통해 어떤 인간을 기를 것인가. 무엇보다 인촌 김성수에게서 주목해야 할 것은 ‘선비적 원칙인’으로 炯眼과 叡智, 그리고 雅量을 가진 인물이라는 점이다. 一石 이희승은 『인촌 김성수: 인촌 김성수의 사상과 일화』(동아일보사, 1988)의 서문에서 ‘선생의 사람 잘 알아보는 형안과 당면한 사태를 정확히 투시해 판단하는 예지 그리고 다른 사람의 과오를 너그럽게 용서하는 넓고 큰 아량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고 적고 있다. 이 책에서 藥田 김성식(1908~1986)은 ‘인촌의 사업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그의 인격에 달려 있었다’고 설명하며, 당시 인촌보다 돈이 많은 사람도 있었고, 인촌보다 시세를 더 잘 탄 사람도 있었으나 인촌의 ‘자본’은 순전히 그의 ‘人格’에 있었다고 했다. 玄民 유진오도 인촌의 인격을 말함에 있어 ‘선비로서의 인촌’을 강조하며, 인품의 온후함과 아랫사람들에게도 경어를 쓰는 대화의 특징을 꼽았다. 결국 어느 시대에나 요구되는 지도자 상은 天時와 地利를 읽어낼 줄 아는 역사적 炯眼과 사람을 알아보고 적재적소에 쓰는 用人之才로서의 叡智, 그리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틀림이 아니라 다름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雅量을 갖춘 선비정신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인촌 김성수를 다시금 생각나게 하는 이유일 것이다.

한용진  고려대·교육학

필자는 고려대에서 박사학위를 했다. 논문으로는 「근대적 교육공간의 성격과 한국의 근대학교」, 저서로는 『근대 이후 일본의 교육』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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