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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인터뷰] 진보 이론의 구심 ‘학단협’과 도전적 문제제기 내건 ‘모색’의 만남
[기획인터뷰] 진보 이론의 구심 ‘학단협’과 도전적 문제제기 내건 ‘모색’의 만남
  • 권희철 기자
  • 승인 2002.05.0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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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5-07 13:34:42

최근 발행된 ‘모색’ 3호는 ‘학문후속세대가 학단협을 말한다’ 라는 기획을 마련, 학술단체협의회(이하 학단협)와 학문후속세대의 괴리현상을 논하고 있다.

이같은 ‘모색’의 문제제기에 대한 학단협의 반응이 궁금했다. 정해구 성공회대 교수(정치학·학단협 운영위원장)와 ‘모색’의 만남은 여기서 비롯됐다. 오늘날 진보가 겪고 있는 위기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새로운 활로 개척을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그들의 대화를 통해 들어본다.

정해구(이하 정):서로 봐주고 비판하지 않는 학계의 분위기 속에서 ‘모색’의 문제제기는 좋은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기쁘게 생각했다. 현재 학단협은 학문후속세대에 대한 대책 앞에서 막막한 상태에 빠져 있다. 후배들의 비판에 자극 받고 있다.

오창은(이하 오):90년대 중반 이후 대학원에 들어온 사람들은 학단협을 모르고 있다. 학부에서 자치활동을 경험했거나 진보적 삶의 지향을 갖고 있는 이들도 학단협이라는 존재에 대해 무감각하거나 자기와는 별개의 조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짙다. 반면 선배들은 새롭게 공부하는 친구들을 못미더워 하기도 한다. 학문적 고민도 없고 현실에 대해 느슨하게 생각하는 태도가 문제라는 것이다. 그런데 진보라는 게 세대의 진보가 돼서는 안 된다. 선배 세대의 정체성에 다음 세대들이 못 따라온다고 한다면, 결국 시련을 경험한 세대만이 진보일 수 있다는 것 아닌가. 이런 소통의 부재 속에서 진보담론이 재생산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정:진보적인 학문운동의 세대차라는 게 있는 것 같다. 경험의 차이가 있다. 70, 80년대 상황과 90년대 이후 상황이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또 사회를 바라보는 태도에도 차이가 있다. 선배들이 거대담론이라면, 후배들은 미시담론을 많이 받아들였다. 따라서 연구방법론에도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이렇게 상호 간에 차이가 있을 때는 뭔가 연결시켜 줄 수 있는 끈을 만들어야 하는데, 서로 이 점에 대해 소홀했던 게 아닌가 싶다. 이에 일종의 격차가 만들어졌다.

오:학단협은 학문의 본원적 고민들, 예컨대 한국에서 학문한다는 것에 대한 문제 등을 더 깊이 파고들었어야 했다. 90년대 초중반에 본질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던 것이다. 80년대 사회과학적 연구방법이 여러 학문에 영향을 끼쳐 간학문적 사고들이 자연스럽게 이뤄지게 만든 것도 선배들이지만, 새로운 기회를 놓친 것도 선배들이다.

정:진보담론이 도식적인 데 반해 87년 민주주의 이행 이후 사회는 분화되고 다양화됐다. 이 괴리 속에서 새로운 진보담론을 못 만든 채 다양한 사회과학적 조류들이 한국에 들어왔다. 결국 진보담론은 집중성을 잃게 됐다. 맑시즘에 바탕해 다양성을 반영할 수 있는 사회적 담론을 만들어야 했는데, 그것을 하지 못했다. 선배들의 책임이 크다. 그러나 사회의 구조적인 변화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주체가 따라잡기에는 변화의 속도가 너무 빠르지 않았는가.

오:제도에 의존하는 경향도 나타났다. 90년대 초반부터 강의평가제가 산발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고, 현재 교수계약제·업적평가제 등으로 교수 신분은 위기를 맞고 있다. 학술진흥재단(이하 학진)의 학술지 평가에 매달리는 현상도 심각하다. 제도에 맞서기보다는 끌려가는 경향이 강하다. 진보의 이름으로 학문을 하자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학진과 밀착된 행태를 보이고 있지는 않은가. 학문의 미래를 위해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있는 게 아닌가.

정:학진 평가 이후 학단협 소속 단체에 미친 영향이 상당하다. 긍정할 부분도 있겠지만, 문제는 무엇을 위한 경쟁이냐는 것이다. 실제로는 학진의 자격 조건에 부합하려는 경쟁이 됐다. 이에 비제도권은 크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학단협의 고민은 제도권보다는 비제도권에서 제기할 수 있는 여러 문제의식들을 학문적으로 만들어보자는 것이었는데, 제도화되는 만큼 문제의식이 약화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오: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교수 지위를 바라지 않고 공부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학단협은 이들에게 진짜 학문이 무엇인지 보여줄 수 있는, 학문을 하면서 나름대로 생계를 도모하는 그런 몸부림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전범을 만들어야 한다. 한편 학단협은 좀 더 열린 자세를 가질 필요가 있다. 현재 재생산 구조는 여전히 인적 관계 중심이다. 특히 서울대가 (권력을) 잡고 있느냐 여부에 따라 단체의 상황이 변하기도 한다. 아예 따로 모임을 만들기도 한다. 우리 안에 내재된 이런 미시적 권력의 폭력들에 대해서 학단협은 냉정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또 선배들은 후배들의 변종 학문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자기를 닮은 학문을 원해서는 안 된다. 권력은 자기 복제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의도적으로 비개방적인 것은 아니다. 부지런해야 하는데 게을러서 그렇다. 폐쇄적인 느낌이 들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다. 후배들의 새로운 모습에 선배들이 배우는 것도 많다. 그러나 후배들의 상황에 익숙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오:현재 학단협 산하 단체들 간에 소통의 문제가 심각하다. 이에 네트워크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학문과 대중이 만날 수 있는 장이 만들어질 수 있지 않겠나.

정:그 동안 학단협은 외부 활동에 치중해 왔다. 사회참여의 측면이 강했다. 내부의 문제, 특히 네트워크의 구성이라든가 선배로서 후배들에게 역할을 제대로 못해온 게 사실이다. 선후배가 머리를 맞대고 여러 문제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있다.

권희철 기자 khc@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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