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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기업 ‘경성방직’의 산파역 …‘근대공업 의지의 소산’ 눈여겨 봐야
근대기업 ‘경성방직’의 산파역 …‘근대공업 의지의 소산’ 눈여겨 봐야
  • 주익종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경제학
  • 승인 2010.07.05 13: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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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백년 논쟁의 사람들] 5. 김성수

‘근대 백년 논쟁의 사람들’ 그 다섯 번째 인물은 경제학 분야에서 선정된 仁村 김성수(1891.10.11~1955.2.18)다. 박기주 성신여대 교수(경제학)는 김성수에 대해 “우리 민족이 약육강식의 세계질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실력양성 뿐임을 자각했다”는 말로 일제 시대 민족자본육성에 나섰던 김성수를 평가했다. 이번 논쟁엔 주익종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경제학)과 한용진 고려대 교수(교육학)가 나섰다. 각각 경제 분야와 교육학계에서 김성수의 삶과 사상이 지니는 근대적 요소를 짚어봤다.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김성수가 지닌 논쟁점은 적지 않다. 그럼에도 학계에서 김성수 연구는 거의 이뤄지고 있지 않다. 이번 기획이 김성수에 대한 학문적 재조명을 환기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지 그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한다.

 

사진은 정당생활 시절의 김성수. 제공: 인촌기념회
오늘날 한국에는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포스코 등 세계 최고 수준의 기업들이 여럿 있다. 그러나 불과 1세기 전만 해도 세계 수준은 고사하고 기업이라고 부를 만한 사업체도 거의 없었다. 이 세계 수준의 기업들은 해방 후, 특히 고도 성장기에 설립됐지만, 그 이전의 식민지 시기에도 뚜렷한 성과를 낸 기업이 여럿 있었고, 그것이 훗날 세계적 수준의 기업이 출현할 토대가 됐다.

식민지 시기의 기업 중 대표로 꼽을 수 있는 것은 단연 경성방직(주)(현재는 (주)경방)이다. 1919년 설립된 이 회사는 일제말까지 자기자본은 55배 이상, 설비는 직기만도 11배 넘게 성장했으며 방기 3만 200추를 갖추고 비슷한 규모의 동종 자회사를 만주에도 둔 대기업이었다. 한국인의 손으로 이 회사가 성장한 것은 한국경제사에서 일대 사건이라 할 만하다.

이 회사의 설립과 초기 운영에서 인촌 김성수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그는 교육자, 언론가, 정치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경성방직을 조직하는 데서 그가 한 기업인으로서의 활동은 조명할 필요성이 있다.

교육과 산업 통해 실력양성운동  나서

그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인촌리의 부유한 집안에서 출생했다. 서양 속담대로라면 은 숟가락을 입에 물고 태어난 셈인데, 그 집안의 부는 조부 김요협(1832~1909), 부친 김기중(1859~1933), 생부 김경중(1863~1945)의 2대에 걸쳐 축적된 것이었다. 그의 집안은 1910년대 초 한국의 10대 부호에 손꼽힐 정도였다.

고창 김씨 가는 단순한 거대 부호에 머물지 않고 시대의 흐름을 따라 문명개화와 근대화, 실력양성활동에 적극 동참했다. 김기중, 경중 형제는 1900년대 후반의 문명개화 흐름에 적극 동참해 호남학회에 참여하고 신식학교를 설립했으며, 자식을 일본에 유학 보냈다.

귀국 후 그는 실력양성의 가장 중요한 두 축인 교육과 산업에 투신했다. 그는 서울의 중앙학교를 인수해 일본 유학한 귀국생들을 교사로 초빙하고 새 부지에 건물을 세워 정규학교인 고등보통학교로 승격시켰다. 아울러 그는 폐업 위기에 있던 의류부속품 제직회사 경성직뉴(주)를 인수해 경영하다가 1917년 일본인 기업가들이 부산에 조선방직(주)을 설립해 최초의 면방직공장 건설에 나선 것을 보고, 경성방직(주) 설립에 착수했다.

김성수는 1918년부터 전국의 지주, 유력자에게서 동조자를 구해 투자자를 모집했다. 전국에서 182명을 창립발기인으로 모아 1919년 2월에 총독부에 회사 설립청원을 내고, 10월에 설립허가를 받았다. 처음에는 직포업으로 출발하지만 나중에는 방적도 겸하고 장차 수출기업으로 발전시킨다는 포부였다.

그러나 경성방직은 출범 후 얼마 되지 않아 경험 미숙과 과욕으로 막대한 손실을 입고 침몰 위기에 처한다. 제1차 대전 종전 후 호황기에 면화, 면사, 면포 등 소위 3품 가격이 급등하자 회사자금으로 그 투기에 나섰다가 자본금의 절반을 날린 것이다. 회사의 해산까지도 운위되던 위기에서 김성수가 회사를 다시 살렸다. 그는 가산을 담보로  긴급 필요자금을 식산은행으로부터 차입하고, 기존 주주의 증자가 여의치 않자, 생부가 25만원을 들여 증자에 참여토록 함으로써 회사를 재무적으로 안정시켰다. 그 덕분에 회사는 설비를 갖추고 기술자를 훈련시켜 생산을 준비할 수 있었다.

경성방직 성장 비결과 총독부 지원설

1923년 조업을 개시한 경성방직은 1920년대 중엽에는 조선내 조포직물 시장의 4% 정도를 차지하는 데 불과했으나 1920년대 말에는 12%로 비중이 커졌다. 그리고 1930년대 후반에는 숙원이던 면방적공장을 갖추고 전체 면방직 시장에서 15% 정도의 비중을 차지할 정도로 성장했다.

이 경성방직은 거액을 투자해 공장 설비를 갖추고 제품을 생산해 시장에서 판매하는 경쟁에서 살아남은 한국 최초의 근대회사라 할만하다. 면방직시장은 일본 기업과 그 제품이 지배했는데, 경성방직은 위험을 무릅쓰고 거액을 투자해 사업을 시작해 시장경쟁에서 살아남아 비록 꼴찌나마 '조선 4대방'의 일원이 됐다. 그 과정에서 경성방직은 사업위험의 감수, 자금의 투자, 생산의 조직, 제품판매전략의 구사, 이익의 재투자를 통한 사업의 지속 및 확장, 회계적 투명성 등의 면모를 보였다. 예컨대 회사는 조선방직에 대한 총독부의 지원방침을 접하고 자신도 지원해 줄 것을 요구해, 보조금을 획득했다. 제품 생산 이후에는 민족적 정서에 호소, 한국인 상인과의 판매이익 공유, 염가 제품의 공급 등 다양한 판매전략을 구사해 시장을 개척했다. 또 회사는 복식부기원리에 따라 총계정원장 등 각종 장부를 작성해 모든 거래를 빠짐없이 기록했으며, 그를 집계해서 대차대조표와 손익계산서 등 재무재표를 작성하는 회계적 투명성을 보였다.

경성방직의 이러한 면모는 그 전까지는 좀처럼 볼 수 없던 것이었다. 개항기까지 대부분의 한국인 회사는 재정수입을 늘리려는 황실에 호응해 황실납세를 전제로 전매권이나 징세청부권을 받았다. 사업을 영위하기보다는 사업권을 하나의 이권으로 되팔거나 다른 영업자를 중간수탈하는 자에 불과했다. 이 회사들은 성과를 내지 못한 채 명멸을 반복해서 대체로 ‘반짝기업’, ‘깜빡기업’이라 부를 만큼 짧은 기간 동안만 존속했다. 물론 회사가 아닌 상공업자 중에는 내실을 갖춘 자들도 있었지만 이들은 지역 시장을 겨냥한 소규모 업체인 경우가 많았다.

총독부의 보조금 지원이나 일제 말 남만방적 설립 허가의 경우를 들어 총독부의 지원 덕분에 경성방직이 살아남은 것처럼 보기도 하지만 이는 타당하지 않다. 자본의 조달, 기술의 학습, 시장의 개척 등과 같은 핵심 과제들은 경성방직 자신이 주도적으로 수행했으며, 생존과 성장의 비결도 여기에 있었다.

김성수는 이 근대기업의 산파역이었다. 인적, 자본적 조직자 역할이 그것이다. 우선, 그는 일본유학을 통해 현상윤, 이강현, 박용희, 장덕수, 송진우, 이광수 등 엘리트 청년들의 네트워크를 만들었다. 각 인물을 그 전공이나 특징에 따라 학교나 신문사, 방직회사에 배치했다. 경성방직은 일본 구라마의 고등공업학교 방직과를 졸업한 이색 인물인 이강현에게 맡겼다. 이강현은 3품 투기의 실무자로서 회사를 그만둘 처지에 있었으나, 김성수가 옹호해 회사를 그에게 맡겼고, 그는 김성수의 동생 김연수가 회사 경영을 맡는 1930년대 중엽까지 15년 넘게 회사의 생존과 성장에 헌신적으로 기여했다. 경성방직이 초기의 어려운 시절을 넘겼던 데는 그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아울러 김성수는 전국 각지의 유지 유력자들을 회사의 발기인과 주주로 규합해 회사를 세웠고, 회사가 파산 위기에 처했을 때에는 생부를 설득해 증자에 참여케 했다.
김성수는 1928년 3월에는 평이사도 그만둬 경성방직의 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하지만 그가 만든 인적 물적 틀을 골간으로 회사는 훗날 대기업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부가 토지에 잠긴 채 그대로 소진된 다른 많은 지주들과 달리, 김씨 가의 부가 근대공업에서 확대 재생산될 수 있었던 것은 김성수의 조직자 역할, 기업가 역할 덕분이었다.

주익종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경제학

필자는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했다. 주요 저서로는 『대군의 척후』 등이 있으며, 공저로는 『대한교과서 한국근현대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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