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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가꾼 사람들 : ⑧조선 후기 의학자 강명길(1737~1800년)
역사를 가꾼 사람들 : ⑧조선 후기 의학자 강명길(1737~1800년)
  • 교수신문
  • 승인 2000.12.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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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12-18 11:40:09
실용적 의서 편찬한 의학자… 부패한 지방관리로 ‘악명’도

김호 / 서울대 규장각·특별연구원

정조대 학자이자 정치가였던 다산 정약용은 1794년(정조18) 7월 왕명을 받고 경기 지역을 暗行하였다. 그리고 각 지역 수령들의 잘못을 조목조목 적어 올렸다. 여기에 정조의 御醫이자 삭녕군수를 지냈던 강명길도 비판의 도마에 올랐다.
“전 삭녕군수 강명길은 늘그막의 탐욕이 끝이 없고 야비하고 인색함이 극심한 자로서 백성의 소송과 관가의 사무에 머리를 저으며 관여하지 아니하고, 食費며 俸祿을 후려쳐서 차지하고 함부로 거두어들이며, (중략) 곡물을 高價로 富民에게 강제 징수하고, 山火田에 세금을 과다하게 부과하여 (중략) 백성의 한탄이 지금도 끝이 없으니 이미 군수의 직책을 떠난 자이지만 죄를 그냥 둘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미 어의로서 임금 정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었던 강명길이라 세상 사람들 가운데 아무도 그를 비판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산이나 되야 부정부패를 일삼던 강명길을 파직하도록 몇 번이고 상소를 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강명길이 누구길래 정조는 그를 그토록 아꼈는가?

정조의 총애받던 어의

강명길은 1737년 출생해 1800년 6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정조가 비명에 죽은 뒤 한달 후인 1800년 7월 13일 御醫였던 강명길조차 갑작스럽게 죽자 정조의 죽음을 둘러싼 타살의 의심이 비밀스러이 나돌기도 했다. 물론 역사적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강명길의 집안은 전형적인 중인 집안으로 그를 중심으로 위·아래대가 모두 의사이거나 수학자 혹은 역관이었다. 특히 수학자와 의사들이 많았는데 강명길의 처가까지도 수학을 전공하는 중인 집안이었으며 강명길의 후손 중에는 후일 고종의 어의를 지낸 사람도 있었다.
강명길의 고향은 분명치 않으나 전하는 말에 의하면 현재 경기도 동두천 일대인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어릴 적 이름은 康命徽였다. 아버지 康德齡은 수학으로 출발했으나 곧 의학으로 전과했으며 강명길 역시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좇아 의술을 공부하다가 의과에 합격한 후 줄곧 의관으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강명길과 정조의 인연은 1769년 그의 나이 33세가 되던 해 부터였다. 강명길이 드디어 내의원에 들어가게 되자 당시 세자였던 정조는 내의원에 初仕(처음으로 관직에 나아감)한 강명길을 불렀다. 그에게 의학 이론을 자세하게 배우기 위함이었다. 이미 할아버지 영조의 병시중을 들면서 의서를 섭렵한 바 있었던 정조는 스스로 의서 ‘壽民妙詮’을 저술할만큼 의학에 조예가 깊었다. ‘백성을 살리는 신묘한 처방’이라는 뜻의 ‘수민묘전’은 허준의 ‘동의보감’을 요약한 것으로서 항상 ‘동의보감’이 번잡하고 편차가 중복되었음을 아쉬워하던 정조로서는 무언가 좀 더 간편한 ‘동의보감’이 필요했던 것이다. 간편하고 이용이 쉬운 조선후기판 ‘동의보감’을 만들고 싶었던 정조는 강명길과 함께 의학 공부를 하던 참에 아예 간편한 ‘동의보감’을 만들어보라고 주문하였다.
“조선의 의서는 오직 허준의 ‘동의보감’이 있는데 비록 상세하다고 하지만 글이 번잡하고 쓸데없기도 하고 말이 중첩되거나 증상이 혹 누락된 것들이 있으며 지금 응용되는 처방들도 기록되지 않은 것들이 많다. ‘內經’(중국고대의 의학경전인 황제내경)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 요점을 아는 사람은 한 마디로 다 할 수 있으나 그 요점을 모르는 사람은 산만하여 끝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모든 의서들을 널리 모아 번잡한 것을 버리고 그 요점만을 취하여 따로 한 책을 만들어 바치도록 하라.”
정조가 강명길에게 요구한 내용이었다. ‘동의보감’의 장·단점을 취사선택하고 여기에 ‘동의보감’ 이후 발전한 의학을 수용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濟衆新編’은 당시 실용적인 의서를 갈망하던 민간 의약업자들에게 제공될 계획이었다. 당시 민간의약업자들은 실용성이 높은 처방서 모음집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정조와 강명길이 ‘제중신편’에 쏟은 노력은 매우 컸다. 편찬 과정에서 정조는 강명길이 직접 지어 올린 내용을 자신이 검토·삭제하고 또 보충하도록 지시하길 수 차례 반복하였다. ‘제중신편’의 편찬이 정조의 세자 시절 기획되어 수십 여 년 만인 1799년 12월에야 비로소 완성될 수 있었던 데에는 그만한 노력과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동의보감’ 실용화한 ‘제중신편’

이른바 조선후기판 ‘동의보감’인 ‘제중신편’이 완성되자 ‘동의보감’의 실용화는 한 단계 진전되었다. 그리고 이후의 의서들은 점점 더 간편하고 실용성을 추구하는 경향이 가속화되어 19세기중·후반에 이르면 그 절정을 이루게 되었다. 증세와 치료의 이론에 대한 구구한 설명은 간데 없고 단지 처방과 처방전을 구성하는 약재명 그리고 이를 사전처럼 만들어 찾기에 편하도록 색인을 갖춘 의서들이 다수 간행된 것이다.
내의원 시절부터 자신을 따랐던, 그리고 요구한 의서의 편찬을 충실히 준비하던 강명길에 대해 정조의 총애는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1797년 회갑이 된 강명길에게 정조는 당대 최고의 화가였던 이명기를 시켜 초상화를 그려주도록 하였다. 심지어 강명길 개인의 회갑연에 필요한 모든 경비를 전액 국고에서 지원해 주도록 특별 명령을 내릴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현재 서대문구 연희동 일대의 넓은 토지를 강명길에게 하사하기도 했다. 강명길이 죽자 후손들은 그를 이곳에 묻을 수 있었다. 이런 강명길이었으니 아무리 거만을 부려도 아무도 그를 비판하지 못했던 것이다.
조선후기에 이르면 내의원 의원들 가운데 상당수가 임금의 총애를 발판으로 경기 지역의 군수로 나가게 되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부정축재를 일삼아 문제가 되었던 모양이다. 앞서 본 바와 같이 강명길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삭녕군수 뿐 아니라 남양, 인천, 풍덕, 부평, 이천, 양주, 목천 등 경기 인근 지역의 군수와 현감을 두루 지냈던 강명길, 여기에 정조의 비호까지 받고 있었으니 그의 방자함은 하늘을 찔렀고 대신들의 눈에는 가시와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후기 의학자로서의 강명길의 위치는 허준의 그것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이른바 간편한 동의보감 ‘제중신편’이 없었다면 17세기 초반에 만들어진 ‘동의보감’의 명성이 2백여년 후인 18세기 그리고 20세기인 오늘날까지 이어지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hojy@plaza.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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