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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1Q84와 부부젤라
[문화비평] 1Q84와 부부젤라
  • 정은경 원광대·문예창작학과
  • 승인 2010.06.22 11: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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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를 ‘드디어’ 읽고 말았다. ‘3권 일본 출간 동시에 68만부 판매’, ‘한국어판 100만 부 돌파 축하 공연’ 운운하는 소리에 ‘귀를 막지 못한’ 결과이지만, 이렇듯 늦은 독서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90년대 하루키에 매료됐던 문청시절에 대한 향수, 그리고 농담 삼아 ‘하루 끼’(하루 읽을 꺼리)라고 부르곤 했던 미학적 실망이라는 양가적 감정이 그것이다. 

이미 매체에서 많이 소개한 바 있듯, 킬러, 난독증을 앓는 매혹적인 소녀, 섹스, 근친상간, 리틀 피플, 공기 번데기 등등 『1Q84』는 하루키 특유의 몽환적 서사 장치들로 가득 차 있다. 이 비극적 연애담이자 판타지가 딛고 서 있는 것은, 1960년대 일본 좌파 학생운동이 ‘적군파’로, 국제 테러리스트로 변질되고, 내부 집단 처형이라는 충격적인 아사마 산장사건으로 막을 내린 일본 전공투와 1995년의 옴진리교라는 실제 사건이다. 문제는 하루키가 이 두 개의 사건을 ‘선구’라는 비밀단체로 접합시키고 있다는 것. 이데올로기적 맹신은 정치적이든 종교적이든 광기일 수 있다는 작가적 메시지일 수 있다.

그러나 『1Q84』는 일본 사회의 무의식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광기의 실체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허무주의적 색채와 환각으로 은폐하고 있다. 『1Q84』를 읽은 대다수의 독자들이 ‘리틀 피플’, ‘공기 번데기’에 대한 의문을 떨치지 못하는 것, 그리고 이 작품을 선전하는 많은 문구들이 흡인력과 가독성, 서사적 재미 이외의 어떤 ‘의미’를 딱히 내세우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렇더라도 묘하게 여운이 남는 게 있다면, ‘1Q84’라는 화두이다. 『1984』에서 따온 『1Q84』는 조지 오웰이 비판했던 전체주의 사회에 대한 현재적 음화이다. 『1984』가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를 박탈한 전체적 질서를 텔레 스크린, 사상경찰, 언론 통제 등으로 명료하게, 낱낱이 보여주고 있다면, 『1Q84』는 결코 이러한 총체성을 보여주지 않는다. ‘1Q84’란 달이 두 개 떠 있는 비현실, 문득 1984년이라는 현실이 ‘Question’으로 모호해져버린 세계를 의미한다. “그것이 어떤 구조를 가진 세계인지, 어떤 원리를 바탕으로 움직이는지 그는 아직 알지 못한다. 그곳에서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지 예측할 수 없다”라는 덴고의 고백은 하루키가 ‘Question’화하고 있는 세계가 비현실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품게 한다.

우리 삶이 놓여있는 세계의 진상이란 무엇인가. UN 안보리 앞에서는 한민족이 유일한 분단국가라는 수치를 잊은 채 서로를 겨냥하고 있는 한편에서는 6·15 공동선언 기념행사를 열리고, 전교조 교사와 스폰서 검사가 나란히 지탄받고 있으며, 국민이 뽑아준 도지사가 범법자로 직무정지를 당하고, 촛불집회 참가 시민이 민주주의 파괴 세력으로 둔갑하고 있는 한편에는 4·19 기념 행사들이 줄을 잇고 있는……. 국가 공식 발언이나 각종 미디어에서 쏟아져 나오는 ‘사실 보도’란 이제 숱한 블로그와 트위터의 글들과 별반 다를 게 없는 ‘의견’이 됐고, 사건의 실상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더욱 은폐할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현재 이 숱한 문제를 안은 채, 커다란 국가적 엑스터시에 빠져들고 있다. 월드컵을 통해 잠시 현실적인 구속력을 잊고 카니발을 만끽하는 것은 삶의 큰 즐거움일 것이다.

그러나 그 ‘벗어남’은 반드시 돌아옴을 전제로 해야 한다. 밀란 쿤데라에 의하면 그리스어에 어원을 둔 엑스터시(extase)란 ‘자기의 바깥’에 있음을 뜻한다. 즉 현재 순간에의 절대적 동화, 과거와 미래의 완전한 망각이라는 것이다. 시간의 바깥, 텅 빈 공간이라는 의미에서 그것은 영원이지만 동시에 죽음을 뜻하기도 한다. 마약 같은 엑스터시가 치명적인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후텁지근한 여름을 달구는 월드컵의 함성, 그 속에는 아프리카 전통 악기인 부부젤라의 소리가 사이렌처럼 울려퍼지고 있다. 처음에 소음이라고 생각했던 그 소리가 이제 별스럽지 않게 된 건, 축구 경기에 몰두해서이기도 하지만 그 소리가 지닌 묘한 특이성 때문인 듯하다.

일정한 멜로디도, 리듬도 없이 그냥 무음처럼 지속되는 그 소리는, 일종의 시간을 무화시키는 몰역사성을 지니고 있으며, 현재적 감각에 빠져들게 하는 묘한 마력이 있는 듯하다. 그것은 어쩌면 미래에 대한 전망의 소멸, 허무주의의 달콤한 유혹, 멜랑콜리한 상실감으로 가득 찬 하루키의 몽환적 작품을 닮은 듯도 하다.
자신과 세계에 대한 질문을 닫아버리는 스타디움에서 울려 퍼지는 세이렌의 유혹, 올 6월은 밧줄로 몸을 묶고 그 유혹을 즐기면서 견딘 오디세우스의 기지가 필요할 듯하다.

정은경 원광대·문예창작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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