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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고도 다른 영화적 문법 … 임상수의 불행은 무엇일까
같고도 다른 영화적 문법 … 임상수의 불행은 무엇일까
  • 강성률 광운대·영화학
  • 승인 2010.06.22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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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시선] 「하녀」, 50년의 시차를 읽다

임상수 감독이 연출한 「하녀」가 세계 유수의 칸영화제 경쟁 부분에 진출하고, 국내 흥행도 200만 명을 넘어섰다. 이런 흐름을 타고 (원작이라고 할 수 있는) 김기영 감독의 「하녀」가 극장에서 재개봉되기까지 했다. 무려 50년이라는 시간 차이를 두고 만들어진 두 편의 영화를 극장에서 동시에 볼 수 있는, 매우 희귀한 일이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김기영의 「하녀」와 임상수의 「하녀」는 같은 점보다는 더 많은 차이점을 지니고 있다. 임상수는 김기영에게서 이야기의 큰 틀만 빌려왔을 뿐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1960년대를 대표하는 트로이카 감독, 즉 김기영, 신상옥, 유현목 셋 가운데 김기영은 가장 독창적인 영화세계를 지닌 감독으로 유명하다. 그의 영화 세계의 초반이라고 할 수 있는 1950년대에는 주로 리얼리즘 경향의 영화를 만들다가 1960년대부터는 대부분 표현주의 계열의 영화를 만들었는데, 그 시작이자 정점이 1960년에 처음으로 자작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한 「하녀」이다. 「하녀」가 높이 평가받는 것은 인간의 마성적 심리를 표현하는 것에 심혈을 기울인 김기영의 모든 것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당시 형성되기 시작한 나약한 중산층의 모습을 성과 죽음이라는 시각으로, 기괴한 이미지와 섬세한 미장센이라는 영화적 장치로 표현했다.


만드는 영화마다 논란의 대상이 됐던 임상수는 나름의 시각으로 시대를 고찰했던 「그때 그 사람들」과 「오래된 정원」이 흥행에서 참패하자 다시 성을 매개로 한 사회 분석에 도전했다. 그 작품이 바로 「하녀」이다. 임상수의 주특기는 인간의 욕망을 노골적으로 ‘까발리는’ 것이다. 홍상수처럼 지식인의 욕망을 서서히, 집요하게 파고드는 것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드러내 놓고 까발린다. 임상수의 「하녀」가 주목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대한민국 상류 1%’라고 할 수 있는 인간들이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비도덕적이고 위선적이며 폭력적으로 살고 있는지 노골적으로 영화 속에 전시한다.


그러므로 임상수는 김기영의 영화에서 큰 틀을 가져왔지만 다른 영화를 만든 것이다. 이를 두고 미학적으로 퇴보했다거나 진보했다고 평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물론 두 감독의 스타일을 두고 다른 평가를 할 수는 있다. 김기영의 「하녀」가 임상수의 「하녀」보다는 영화사적으로 오래 남을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김기영의 「하녀」는 1960년 영화의 최전선에 있었지만, 임상수의 「하녀」는 그렇게까지 평가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임상수의 도발적 상상력이 「하녀」에 와서는 많이 닫혀버렸고(그의 영화는 점점 패배적이고 허무주의적으로 돼 간다), 그것을 보여주는 미학적 방식도 그리 뛰어나지는 않다.

그는 어떻게 리메이크했는가


그런데 내가 두 영화에서 주목하는 것은 이것이 아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시대적 의미이다. 왜 임상수가 지금 와서 「하녀」를 리메이크한 것인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리메이크했는가가 더 중요하다. 임상수가 가장 역점을 둔 것은 50년이라는 시차를 두고 발생한 남한 사회의 모습이다. 김기영의 영화에 등장한 하녀는 시골에서 상경한 가난한 누이들의 모습이지만, 임상수 영화의 하녀는 대학도 다녔고 지방에 작은 아파트도 소유하고 있는 이들이다. 김기영 영화의 배경은 부인이 재봉틀을 십년 동안 돌려서 겨우 마련한 작은 이층집이지만(김기영은 단 한 번도 이 집의 정원이나 풍경을 보여주지 않는다. 암울한 실내의 프레임 속에 갇힌 인물들만 보여준다), 임상수 영화의 배경은 ‘대한민국 1%’들만이 살고 있는 어마어마한 대저택이다(그래서 관객들은 이 집과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이들의 삶을 본의 아니게 훔쳐보게 된다. 시각적으로 호사를 누리는 것이지만 그리 기분 좋은 경험은 아니다). 때문에 밥을 먹기 위해 하녀를 해야 했던 시대에서 하녀라는 직업이 웬만한 직장보다 더 좋은 대우를 받는 것으로 바뀐 시대에 주목한다.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지배층의 뻔뻔스러움이다. 집의 주인을 보자. 김기영의 「하녀」에서 남자 주인은 부인이 친정에 간 사이 실수로 하녀를 범한 것에 고민하면서 괴로워한다. 부인도 하녀에게 밥을 갖다 바치면서까지 자신들의 가족과 그 지위를 어떻게든 지키려고 노력한다(물론 이런 상황 때문에 하녀가 집안을 지배하게 되는, 너무나 파격적인 내용이 등장한다). 그러나 임상수의 「하녀」에서 남자 주인은 부인이 집에 있을 때 하녀를 범하고도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고 당연한 것처럼 수표로 무마시키려 한다. 하녀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 부인과 장모는 차마 입에 올릴 수 없는 비열한 방법으로 낙태시키고, 그 사실을 안 남편은 뻔뻔스럽게도 장모에게 화를 낸다. 얼마나 폭력적이고 위선적인가.


시대가 변했기 때문에 영화의 결말도 변했다. 김기영은 자신의 영화에서 항상 성과 죽음의 문제를 다루었다. 하녀를 범했기 때문에 아들이 죽고 자신도 하녀와 함께 동반자살하는 김기영의 영화와 달리 2010년의 상류층은 자신들이 보는 앞에서 하녀가 분신자살을 해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탄탄하게 그들만의 이너 써클을 구축한 이들에게 더 이상 무서운 것은 없다. 모든 것이 보장된 이너 써클에는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때문에 임상수의 「하녀」 마지막 장면은 외국에 나간 그들이 행복하게 야외에서 생일파티를 하는 모습이다. 김기영의 영화에서 자주 거론되는, 신분 상승과 추락의 알레고리인 계단의 이미지도 임상수의 영화로 오면 주인이 사용하는 계단과 하녀가 사용하는 계단으로 양분된다. 하녀의 계단에서는 오로지 추락만 존재할 뿐이다.

오로지 추락만 존재하는 계단


영화가 시대를 반영한다면, 50년의 시차를 두고 만들어진 「하녀」 두 편은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형성되기 시작한 시대의 중산층 모습과, 급격한 자본주의의 팽창 이후 형성된 최상류층의 모습을 매우 직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김기영의 「하녀」가 그만의 독창적인 표현법을 통해 영화적 능력을 넓혔다면, 임상수의 영화는 계급 이동이 더 이상 불가능한 닫힌 사회에 대한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고 있다. 그런데 임상수의 이런 영화가 흥행한 것은 영화 속의 사회적 메시지에 관객들이 공감했다기보다는 ‘18금’이라는 ‘야한’ 영화로 인식됐기 때문인 것 같다. 이것이야말로 임상수에게는 정말로 큰 불행이 아닌가 싶다.

강성률 광운대·영화학

필자는 동국대에서 박사학위를 했다. 논문으로는 「영화에서의 일제말기 신체제 옹호 논리 연구」, 저서로는  『한국영화, 중독과 해독』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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