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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새로운 사유는 거기 있는가
미학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새로운 사유는 거기 있는가
  • 우주영 기자
  • 승인 2010.06.21 16: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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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정치’ 논쟁, 문단을 달구다

시가 다시 정치를 사유하고 있다. 2009년 1월 발생한 용산참사가 시인들을 다시 ‘정치’의 영역으로 호명했다. 진은영 시인의 「감각적인 것의 분배: 2000년대 시에 대하여」(<창작과 비평>, 2008년 겨울호)가 기폭제가 됐다. 문단의 반응은 예민했다. 시가 어떻게 정치적일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은 시는 본성상 실재하는 사물과 상관없는 이미지를 통해 탄생한다는 의견과 부딪히며 시의 본질에 대한 질문으로 되돌아오기도 했다. ‘정치적인 것’과 ‘정치학적인 것’을 구분해야 한다는 충고도 있었다.

논쟁의 중심엔 자크 랑시에르(J. Rancie're)가 있다. 미학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관계를 새롭게 고민한 그의 이론은 시와 정치에 대한 이번 논쟁에 이론적 탄력을 제공했다. 하지만 그 해석을 놓고도 의견이 엇갈린다. 사실 시와 정치에 관한 논쟁은 그다지 새로운 것은 아니다. 1960년대 불온시 논쟁뿐 아니라 1920년대 낭만파와 사회시 논쟁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때문에 이번 논쟁이 이전 고민과 어떤 차별성을 획득하는 지가 논쟁의 귀추를 결정한다. 시가 정치와 조우해 어떤 미적 재구성이 가능할지 시인들의 논의는 좀처럼 잦아들지 않고 있다.

시가 미학성을 획득하는 것뿐 아니라 직접적으로 정치적이어야 한다는 진은영의 고민은 예술의 정치성을 새롭게 설정한 랑시에르의 이론이 촉매가 됐다. 문단은 이 질문을 ‘감각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사이에서 오늘날 시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으로 확장하며 논쟁에 불을 붙였다(김행숙, 서동욱, 신형철, 심보선 좌담 「감각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사이에서-오늘날 시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문학동네> 2009년 봄호). 시의 정치성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느냐를 놓고 논의가 이어졌다. 시인이자 비평가인 서동욱은 시가 메시지가 아닌 새로운 감성적 체험을 가능케 해줄 형식으로 정치성을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시인 심보선은 그 ‘정치’가 문학에 한정된 정치적 효과라는 지적이다. 사회적 행동을 촉구하는 정치성을 시는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까.

시인이자 비평가인 이장욱은 「시, 정치, 성애학」(<창작과 비평> 2009년 봄호)을 통해 비단 시인뿐 아니라 사회적 조건이 숙명이 돼버린 현대예술가들이 세계의 문제에 등을 돌리기보단 그것들과 함께 살아내면서 창조의 가능성을 모색해야 한다는 말로 진은영의 주장을 이어간다. 진은영이 시를 쓰는 행위 밖에서 삶과 정치의 실험을 시도했다면 이장욱은 시를 쓰는 행위 자체에 내재한 감성의 직접성에서 시의 정치성을 돌출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비평가 강계숙은 ‘시의 정치성은 추구의 대상이 아닌 사후적 확인을 요구하는 또 하나의 가능한 해석’이란 우려로 시와 정치의 성급한 만남을 경계했다(「‘시의 정치성’을 말할 때 물어야 할 것들」, <문학과 사회> 2009년 가을호).

‘정치적인 것’은 조건인가 목표인가

시와 정치의 접점에 대한 논의는 사실 상반된 입장이 부딪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진은영과 심보선, 김행숙 등이 시의 정치적 개입을 모색한다면, 서동욱과 강계숙 등은 시가 섣불리 정치성을 띠려는 데 다소 유보적인 입장이다.

다시 시와 정치를 고민해야 하는 시기가 온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시와 정치가 만나는 지점은 1980년대와는 달라야 할 것이다. 이번 논쟁이 ‘시는 어떻게 정치적일 것이가’란 애초의 고민에서 ‘시의 역할이 무엇이냐’는 원론적인 논의로 비껴간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해서도 시가 정치와 만나는 지점에 새로운 모색이 필요하다. 먼저 ‘정치’, ‘정치적인 것’의 명확한 개념 경계가 필요하다. 비평가 신형철은 ‘정치적인 것’과 ‘정치학적인 것’을 구분해야 한다고 정리한다(「가능한 불가능」, <창작과 비평> 2010년 봄호). 정치가 ‘조건’인 것은 정치학적이고, 정치가 ‘목표’인 것은 정치적이란 구분이 필요하다는 제안이다. 문학을 통해 사회적인 이슈에 어떤 식으로든 발언을 하는 작품들이 ‘문학은 원래 정치적인 요소를 내재하고 있다’는 일반론에 흡수되지 않기 위해서는 정교한 개념적 경계가 필요하다.

2009년 발생한 용산참사는 시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추구했던 미의 세계가 현실과 어떤 관계설정을 해야 할지 고민하게 만들었다. 현실이 시가 정치를 외면할 수 없는 자극이었다면 랑시에르의 이론은 그 자극이 반응하는 통로가 됐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사장시킨 ‘정치적인 것’을 되살려내 다시 미학적인 것이 어떻게 사회에 분배될 것인가를 모색한 그의 주장은 시와 정치 논의를 더욱 선명하게 부각시켰다. 그러나 본래 랑시에르가 조건으로서, 목표로서의 정치를 모두 언급한 데 반해 이번 논쟁에서 그의 이론은 조건으로서의 정치에 기울어져 해석되고 있다. 낯선 것과의 만남을 통한 감성적, 지성적 촉발은 문학의 중요한 계기가 된다. 랑시에르의 이론이 시적, 정치적 탐구의 새로운 장을 연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고명철 교수의 말처럼 랑시에르가 한국사회의 한 국면을 설명하는 틀이 되기 위해서는 이론뿐 아니라 그 이론의 대상이 될 작품의 생산이 함께 뒷받침돼야 한다.

대상없는 논쟁은 공허하다. 시와 정치 논쟁 역시 2008년 겨울 진은영이 논쟁의 화두를 던진 이후 생산적인 논쟁으로 번지지 못하고 있다. 시의 정치적인 모험을 촉구하면서도 그 비평적 대상이 되는 마땅한 텍스트가 등장하지 않는 한 논의의 파급력은 기대할 수 없다.

텍스트 생산이 뒷받침 돼야

 

이성혁은 시의 모험을 촉구하면서도 그가 정의한 정치학적인 시, ‘정치시’가 아직 등장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러나 고명철 교수는 과연 텍스트가 부재한가에 의문을 던진다. 문예지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는 이번 논쟁이 그 대상으로 삼고 있는 텍스트조차 문예지 중심에 갇혀있는 것은 아닌지 지적한다. “실제 노동자로서 시의 정치성에 대한 고민을 작품으로 실천하는 김사이나 김혜자 등이 논쟁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한 이번 논의는 절름발이에 불과하다.” 이번 논의의 시야가 좀 더 확장돼야 한다는 주문이다.

이장욱에 따르면 이번 논쟁은 결국 미학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과 어떻게 관계맺을 지에 대한 고민의 발로다. 그러나 문단은 1980년대 이미 황지우나 박남철 등 시가 가진 독특한 미감 속에서 전위적인 정치 감각이 만개했던 때를 기억한다. 형식적 민주주의가 도래한 후 시는 1980년대와 결별하고자 했지만 결과는 소통의 단절이었다. 이번 시와 정치 논쟁이 문단 밖에까지 그 울림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서는 미학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불균형을 해결하는 문제에 문단은 더 치열하게 반응해야 한다

우주영 기자 realcosmos@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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