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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교양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교양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 이현우 한림대 연구교수·노문학
  • 승인 2010.06.14 13: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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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강 시즌이다. 한 학기 강의를 마무리하면서 다시금 원론적인 질문을 던진다. 교양이란 무엇인가. 러시아문학에 대한 교양강의를 끝내자니 “현대의 교양은 도스토옙스키나 실존철학이 아니라 아인슈타인이고 뇌과학”이라는 일본 저술가 다치바나 다카시의 일갈이 다시금 떠올랐고, 새로운 IT문화가 주도하는 시대에는 문·사·철이 아닌 ‘새로운 교양’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일리가 없지 않다는 생각이 새삼 들어서다. 

일본인 저자들의 책을 뒤늦게 몇 권 펼쳐보았다. 실상 우리가 쓰는 ‘교양’이란 말도 따져보면 일본에서 건너온 말이고, 교양주의의 ‘원조’ 또한 일본의 ‘다이쇼 교양주의’가 아니던가. 부국강병의 논리에 휘둘렸던 메이지 시대와는 달리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기에는 철학이나 문학, 역사 등의 인문서 독서를 강조한 새로운 문화가 고학력 엘리트들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그것이 ‘교양주의’라 불리게 된다. 일본에서는 이 새로운 문화적 흐름이 이와나미출판사에 의해 주도됐다고 하여 ‘이와나미 문화’라고도 부르는 모양이다. 가령 ‘세계문학전집’이나 ‘세계사상전집’ 등은 ‘교양주의’의 가장 대표적인 표상이다. 교양의 지표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독서 유무였던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1970년대 대중사회가 성립하면서 이러한 교양주의는 쇠퇴하기 시작한다. 일본의 경우는 ‘지식인 시대의 종언’과 맞물리는 것이 바로 ‘교양주의의 쇠락’이었다. 이런 ‘역사적 교양주의’가 지식대중화사회에서, 그리고 ‘대졸자 주류사회’에서 여전히 예전과 같은 위상과 의의를 보존할 수 있을까?

도쿄대 교양학부에서 엮은 『교양이란 무엇인가』(지식의날개, 2008)에 실린 좌담에서 교수들이 토로하고 있는 문제의식도 한국 대학의 현실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학생생활실태조사’ 설문에서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 항목에 대한 대답을 보면, 1960~70년대 학생들이 주로 ‘인생의 의미’라든가 ‘자아의 확립’이라고 적었던 데 반해서 요즘 학생들은 취업이나 졸업, 교우관계 등 고만고만한 문제들을 적어낸다고 하며, 학생들의 이런 고민을 교양학부와 어떻게 연결시킬 것인가가 말하자면 교양학부 교수들의 ‘고민’이다. 거기에 덧붙여, 다이쇼적 교양주의가 너무 근대적인 자의식에만 얽매여 인간의식의 문제에만 초점을 맞춘 탓에 자연과학 쪽 지식은 등한시했다는 지적, 따라서 21세기 교양의 과제 중 하나는 자연과학적인 식견을 어떻게 교양 안으로 도입해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라는 제안도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인문교양 대신에 과학교양에 압도적인 비중을 할애해야 한다는 다치바나의 주장과도 통하는 대목이다.

『교양이란 무엇인가』가 대학 안의 고민과 모색을 담고 있다면, 대학 밖의 시각은 좀 더 신랄하다. 일본의 경영컨설턴트 오마에 겐이치는 『지식의 쇠퇴』(말글빛냄, 2009)에서 이제 교양은 더 이상 “칸트나 헤겔, 데카르트와 같은 철학자나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와 같은 고전문학을 중심으로 한 문화”가 아니라고 말한다. “마르크스나 케인스와 같은 경제학의 대가나 뉴턴, 아인슈타인과 같은 과학자”도 아니고, “정치학자 마루야마 마사오나 이와나미신서”도 아니다. 과거에는 클래식이나 고전문학, 고전미술에 관한 소양이 비즈니스 생활에서 여권이나 소개장 역할을 했지만 이제는 통하지 않게 됐다는 것이다. 어째서인가.

이유는 사뭇 단순한데, 이른바 ‘글로벌 리더’들이 전통적인 교양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대신에 그들의 관심은 “당신은 지구시민으로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가?” 같은 문제에 쏠려 있다는 지적이다. 과거에는 문학이나 음악 등에 일반인보다 깊은 조예를 갖고 있는 사람이 교양인의 모델이었지만, 지금은 사회공헌과 환경문제에 대한 관심이 훨씬 더 중요한 척도다. ‘지적기반의 공유’가 교양의 중요한 기능이라면 시대의 변화에 따라 교양의 내용도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철학’과 ‘그리스신화’에 관한 지식 대신 ‘인터넷 사회의 최첨단 동향’이 21세기 교양이라는 지적은 ‘교양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이 왜 다시 던져져야 하는지 시사해준다.

애초에 ‘교양’이란 말의 기원은 독일어 ‘빌둥(Bildung)’이었다. 흥미롭게도 일본 저자들의 교양론은 이 점을 한 번 더 상기시켜준다. 『교양이란 무엇인가』에서 생명과학 전공의 한 교수는 독일 대학에 근무하던 시절 동료들이 일본문화와 문학에 대한 깊이 있는 질문을 자주 던졌던 일을 회상하면서 이른바 교양이 없으면 그들과의 대화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통감했다고 고백한다. 오마에 겐이치 또한 ‘지구에 무엇을 돌려줄 수 있는가?’란 현재적 교양의 문제를 가장 열심히 고민하는 사람들이 독일인이라고 말한다. 독일의 경영자들은 뜬금없이 “당신은 터키를 위해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란 질문을 던지는데, 그러한 이슈에 제대로 답하는 것이 그가 생각하는 ‘교양’이다. 시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교양의 핵심은 ‘독일인의 질문에 답하는 것’인가 보다.

이현우 한림대 연구교수·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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