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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실험실, ‘호모 사케르’ 개념을 출현시키다
사유의 실험실, ‘호모 사케르’ 개념을 출현시키다
  • 이택광 /경희대·영미문화이론
  • 승인 2010.06.07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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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택광의 세계사상지도 읽기] <5> ‘이론화’의 길을 걷는 이탈리아 사상가들

현대사상의 지형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또한 이탈리아일 것이다. 아감벤과 네그리를 제외하고 유럽의 사상 흐름을 논할 수 없는 것은 둘째치고라도, 로젠조 키에사나 알베르토 토스카노처럼 영국에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신진이론가들도 무시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상당한 이론적 차이를 보이는 이들을 이탈리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단일한 그룹으로 묶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독일과 변별할 수 있는 ‘이탈리아적 차이’를 이들이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탈리아는 한국의 상황과 비슷한 지적 풍토를 드러내는 국가인 것처럼 보인다. 완강한 가톨릭 보수주의가 지배적인 국가에서 이탈리아의 지식인들은 유럽의 중심과 구별되는 온도차를 느낄 수밖에 없다는 측면에서 그렇다.

최근 리-프레스 출판사에서 나온 『이탈리아적인 차이』라는 책의 서문에서 키에사와 토스카노는 식물인간 상태에서 17년이나 지낸 한 여성의 안락사를 아버지가 결심했을 때 정부와 교회가 나서서 이를 저지한 사건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런 사실에서 이탈리아는 북유럽과 상당히 다른 지배체제의 ‘권위주의’가 일상화돼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여성의 안락사를 반대하는 기자회견에서 이탈리아 수상 베를루스코니는 “이 여성이 아직도 젊고 생리를 하는 것으로 보아 충분히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안락사를 시킬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한 마디로 이들은 국가권력을 ‘예외적’으로 사용해서 한 여성의 생명을 ‘수호’한 것이다. 이에 대해 키에사와 토스카노는 아감벤의 용어인 생명정치의 ‘예외성’이 이탈리아의 상황에서 참으로 외설적으로 구현됐다고 말한다. 물론 이런 예외적 상황에서 아감벤의 용어에 묻어 있는 하이데거적인 엄숙함은 내파돼 버린 것처럼 보이지만 말이다.

유럽의 중심과 구별되는 온도차


정작 이탈리아에서 하이데거적 비장미를 간직한 예외적 인간 ‘호모 사케르’는 세속적 차원에서 국가와 교회에 의해 변용돼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예외적 인간’이나 ‘소수자’를 보호하기 위해 권력을 ‘예외적’으로 사용하는 이탈리아에서 지식인들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겠는가.

이들이 주목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다른 유럽국가와 확연하게 구분할 수 있는 이탈리아적 특수성이다. 이탈리아에서 이 논의는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어떻게 보면, 20세기 초반 미래파의 등장부터 이탈리아 지식인들은 다른 유럽국가와 구별할 수밖에 없는 이탈리아적인 것의 차이를 이야기해왔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탈리아적인 특수성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따라서 다양한 논의들이 이탈리아의 사상 흐름을 주도했다는 사실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다채로운 마르크스주의의 이탈리아 판본들이 탄생한 것이다. 이탈리아적 특수성은 기 드보르가 지적했듯이, 폭력과 압제의 이미지로 점철돼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여기에서 주목해야할 점은 드보르가 이탈리아를 하나의 ‘실험실’로 파악했다는 사실이다. 관광엽서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이탈리아’(belle Italia)와 정반대의 풍경을 드보르는 발견한 셈인데, 이런 실상을 ‘실험실’로 규정함으로써, 이탈리아는 다른 유럽 국가에서 일어날 수 없는 ‘새로운 것’이 출현할 수 있는 공간으로 여겨지게 됐던 것이다.

‘새로운 것’이 출현할 수 있는 공간


이런 드보르의 문제의식은 네그리와 『제국』을 함께 집필한 마이클 하트에게도 이어진다. 하트는 탈노동자주의적인 급진이론의 가능성을 타진하면서, 이탈리아를 ‘새로운 정치적 사유의 형태’가 출현할 수 있는 인큐베이터로 간주한다. 물론 이런 이탈리아의 특수성은 ‘제국’(empire)이라고 지칭할 수 있는 경제적 영역에 대한 탈근대화와 사회문화적 영역에 대한 미국화라는 ‘총체적 국면’과 밀접하게 관련을 맺을 수밖에 없다는 전제를 깔고 있지만 말이다.

한국의 지식인과 유사한 처지에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탈리아 지식인들은 근대적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수립을 지연당한 역사적 경험을 보편화하면서 특유의 이론들을 정립하려고 노력했다. 이런 이탈리아적 예외주의야말로 이탈리아적 차이를 인준하는 하나의 이념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에릭 홉스봄의 지적처럼,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이탈리아적인 예외주의를 만들어낸 것은 민족주의의 보편화와 무관하지 않다. 역사의 진행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민족주의는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는 그 독일과 이탈리아를 만들어낸 결정적 이데올로기이다. 따라서 문제는 이런 이데올로기를 떠받치고 있는 현실에 대한 이론적 탐색이 이탈리아적인 상황에서 우선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이탈리아적인 차이에 가장 주목하고 있는 당사자는 바로 네그리다. 그는 이탈리아의 지식계에 영향력을 주고 있는 하이데거주의를 ‘약자의 사고’라고 지칭하면서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다. 네그리는 약한 사고와 대립적인 관점에서 ‘근육질’을 갖춘 혁명적 주체성의 정치적 존재론을 역설한다. 다소 자의적인 느낌을 주긴 하지만, 강한 자의 사고와 약한 자의 사고를 구분하는 네그리의 분류법은 정치적인 것과 형이상학적인 것, 그리고 문화적인 것을 둘러싼 이탈리아의 논쟁에 중요한 계기를 제공했다. 네그리가 촉발한 논의는 이탈리아적인 상황에 영향을 미친 유럽사상에 대한 점검을 요청하게 됐고, 이를 통해 ‘창조적인 차이’로서 이탈리아적인 이론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했다.

이런 과정은 필연적으로 이탈리아적인 상황에서 벌어지는 유럽이론들의 백가쟁명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 흥미로운 것은 극단적으로 특이한 편협성과 강력한 보편성이 마르크스주의라는 매트릭스에서 서로 충돌을 일으키는 생생한 장면들을 이탈리아의 사상지형도에서 읽어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네그리가 마르크스주의를 푸코나 들뢰즈의 이론과 버무려서 내놓는다면, 라보티 같은 반대자는 이런 프랑스산 이론이야말로 ‘약한 자의 사고’를 그대로 보여주는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프랑스산 이론에 대한 비판은 이탈리아적인 이론의 변형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하이데거주의에 대한 문제제기와 맥이 닿아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작 네그리는 이런 하이데거주의를 비판하는 입장인데, 오히려 바티모나 아감벤이 하이데거의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 누구보다도 하이데거적인 느낌을 강하게 풍기는 아감벤은 역설적으로 약한 자의 사고에 대한 비판을 비켜가고 있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아감벤은 토종 이탈리아 이론가들에게 비판적인 검토 대상인 프랑스산 이론에 누구보다 경도돼 있는 이론가이고, 하이데거주의는 물론 푸코의 생명정치와 통치성에 대한 이론을 자신의 이론에 활용하고 있다. 또한 아감벤은 강자의 사고를 주창하는 네그리와 달리 약자의 사고를 중요한 이론적 근거로 제시하는 입장이라는 사실에서 이탈리아의 사상지형도에서 ‘예외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예외적 입장’과 ‘약한 자의 사고’


네그리의 파리 망명 사건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1980년대 이탈리아는 역사적으로 반동의 시기였다. 한국에서 광주가 그랬듯이, 권력에 의한 민중운동에 대한 탄압은 극에 달했고, 이에 따라서 ‘약한자의 사고’가 중요하게 부각되기 시작했다. 프랑스를 경유해서 보완되고 풍부해진 프랑스산 이론들은 이런 이탈리아적 특수성을 보편화하기 위한 ‘외부적’ 관점을 제공했다. 넓게 본다면, 아감벤도 이런 이탈리아적 조건에서 ‘호모 사케르’라는 개념을 만들어낸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렇듯, 오늘날 이탈리아의 사상 흐름은 민족적인 특이성을 바탕으로 국제적인 보편성의 구현이라는 ‘이론화’의 길을 걷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택광 /경희대·영미문화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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