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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수상 - 생태이론과 화쟁사상의 종합
최우수상 - 생태이론과 화쟁사상의 종합
  • 교수신문
  • 승인 2002.05.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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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一不二, 상생의 사유체계로 온생명 조화 모색
이도흠 / 한양대·국문학

봄이다. 봄 같지 않은 침묵의 봄! 미음완보하며 답청을 하러 관악에 올랐건만 세상은 온통 누렇다. 너설을 타고 연주대에 올라 지구의 미래에 대해 생각해 본다. 심층생태론, 사회생태론 등 서양의 대안들을 떠올려 보지만 뭔가 부족하다. 패러다임 자체가 변해야 하지 않을까. 홍수를 막는 방법은 크게 보아 두 가지이다. 서구 사회는 인간과 자연을 이항대립으로 나누고 인간에게 우월권을 주었기에 댐을 쌓는 방식을 택하였다. 댐을 쌓듯 인간 주체가 자연에 도전하여 자연을 개발하고 착취하는 것을 문명이라 하였고 이것으로 그들은 17세기 이후 전 세계를 지배하였다. 그러나 댐은 물의 흐름을 방해하여 물을 썩게 하고 결국 거기에 깃들여 사는 수많은 생물을 죽이고 심지어는 주변의 기후를 변화시키고 지진을 일으키기도 한다.

상큼한 초록빛 여름이다. 남원에서 기차를 내려 산을 넘고 물을 건너 함양 땅 대덕동 上林에 왔다. 댐을 쌓는 것이 근대적, 서구적 패러다임에서 비롯된 대안이라면, 물길을 터서 물을 흐르게 하고 나무를 심는 것은 화쟁의 不一不二의 패러다임에서 비롯된 대안이다. 1천1백년 전 신라 진성왕 때 함양의 태수로 부임한 고운 최치원은 매년 홍수로 고통을 받는 함양의 백성을 구하고자 위천을 따라 이 숲을 조성하였다. 下林은 사라져버렸으나 지금도 폭 2백∼3백미터, 길이 2킬로미터에 걸쳐 2백년 된 갈참나무를 비롯하여 1백14종, 2만여 그루의 활엽수목이 원시림처럼 깊은 숲을 이루고 있다. 댐은 물을 썩게 하고 생명들을 죽이지만 숲은 빗물을 품었다가 정화한 다음 서서히 내보낸다. 다져진 토양은 시간당 10밀리의 비를 품는 반면에 잘 가꾼 숲은 시간당 2백밀리 이상의 강우를 가둔다.

하나가 곧 전체이고 전체가 곧 하나이다[一卽多多卽一]. 박테리아 한 마리가 죽는 것도 우주 전체의 어떤 목적과 섭리에 따라 일어나는 전체 속의 부분, 그러나 전체를 담고 있고 전체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부분이다. 공중에 떠다니는 미생물조차 나와 인연의 사슬이 깊어 수천 억 년 가운데 같은 시대에 수조 개의 별 가운데 같은 별에 함께 살아가는 것이 아니던가. 그들이 있어서 내가 있고 내가 있어서 온생명이 있다. 이런 화엄의 연기론을 더 체계화한 화쟁의 불일불이에 대하여 원효는 ‘금강삼매경론’에서 씨와 열매의 비유로 설명한다. 씨는 스스로는 무엇이라 말할 수 없으나 열매와의 ‘차이’를 통하여 의미를 갖는다. 씨와 열매는 별개의 사물이므로 하나가 아니다[不一]. 국광 씨에서는 국광사과를 맺고 홍옥 씨에서는 홍옥사과가 나오듯, 씨의 유전자가 열매의 거의 모든 성질을 결정하고 열매는 또 자신의 유전자를 씨에 남기니 양자가 둘도 아니다[不二]. 씨는 열매 없이 존재하지 못하므로 空하고 열매 또한 씨 없이 존재하지 못하므로 이 또한 공하다. 그러나 씨가 죽어 싹이 돋고 줄기가 나고 가지가 자라 꽃이 피면 열매를 맺고, 열매는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지만 땅에 떨어져 썩으면 씨를 낸다. 씨가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자 하면 씨는 썩어 없어지지만 씨가 자신을 공하다고 하여 자신을 흙에 던지면 그것은 싹과 잎과 열매로 변한다. 공이 생멸변화의 전제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화쟁은 우열이 아니라 차이를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고, 투쟁과 모순이 아니라 자신을 소멸시켜 타자를 이루게 하는 상생의 사유체계이다. 서구의 이항대립의 철학이 댐을 쌓아 물과 생명을 죽이는 원리를 이룬다면, 화쟁의 불일불이는 물이 흐르는 대로 흐르며 물은 나무를 살게 하고 나무는 물을 품는 원리이다.

삽상한 금빛 가을날이다. 동양의 한 변방, 광릉의 숲 속에서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장자를, 원효를 떠올린다. 과연 동양이 대안일까. 서양과 대화를 하지 않으면 보편성을 갖지 못한다. 이성중심주의가 지금의 위기를 불러온 한 원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이성을 무시한다면 ‘지금 여기에서’ 생명을 무차별로 학살하고 있는 죽음의 문화를 비판할 근거는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세상이 무지몽매함과 야만, 고립에 빠져 있을 때 이성은 그 어두움 속을 밝히고 벗어나도록 이끄는 빛이다.

화쟁은 여느 동양사상처럼 신비주의도 반과학주의도 아니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지금의 환경위기를 낳은 근본 원인과 모순에 대한 첨예한 인식과 실천이 없다면 그것은 당위적, 선언적 공리공론에 그친다는 점이다. 지금 여기에서 자본주의 체제가 환경위기를 확대 재생산하고 있는데 이 또한 불일불이로 언제인가는 포용될 것이라며 실천을 행하지 않는다면 이는 추상적 관념으로 전락한다. 화쟁의 대안은 21세기 사회의 현실이란 맥락에서, 이 땅 위에서 호흡하고 있는 우리 몸을 바탕으로 우리 몸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면 의미를 갖지 못한다.

최치원은 상림을 조성하기 전에 둑부터 쌓았다. 세계가 하나이나 하나면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기에 편의상 이데아와 그림자, 본질과 현상 등 둘로 나누어 본다. 그러니 둘로 보는 것은 짓[用]이다. 이것이 허상임을 깨닫고 다시 하나로 돌아가는 것은 참[體]이다. 이것이 바로 화쟁의 핵심이라 할 一心二門이다. 그러니 둘의 사유로 환경위기를 야기한 원인과 모순을 합리적으로 인식하고 비판해 둑을 쌓고선 하나의 사유로 돌아가 상림을 조성하는 것이 ‘화쟁적 합리성’이다.

잿빛 겨울날 관악에 다시 올랐다. 겨울나무가 바람에 잉잉 우는 소리뿐 사위는 적막하다. 생명의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죽은 듯 서 있는 저 겨울 나무마다 봄의 싹을 곱다랗게 키우고 있는 것이 아니던가. 새만금이 다시 막히고 대형 댐은 속속 들어설 정도로 현실은 냉혹하다. 하지만 우리가 각자 몸 속에 잠자고 있는 불성, 온생명을 보듬으려는 마음을 하나 둘 드러낸다면, 화쟁적 합리성으로 온생명을 죽이는 사람과 정책과 구조에 대해 비판하고 실천을 행한다면, 온생명이 서로 조화와 균형 속에 서로를 살리는 새로운 지구 생태계가 열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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