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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상 - 寫生과 생명
우수상 - 寫生과 생명
  • 교수신문
  • 승인 2002.05.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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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畵論으로 ‘생명 현상’ 분석
김백균/ 서울대 연구원·미학

寫生 자구적인 해석만으로 보면, 생명을 그리는 것이다. 적어도 근대 일본 사람들에 의해 ‘drawing’이라는 서양어가 사생이라는 말로 번역되어 쓰이기 전까지 사생이란 당연히 생명 현상을 그리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지금 우리사회에 통용되는 대상을 직접 보고 그린다는 뜻의 사생이라는 말의 사용은 일본을 통해 근대화의 과정을 겪게 되면서 탄생한 의미의 왜곡 현상이며, 우리의 또 다른 아픔이다.

전통적 동양의 사유체계에서 그림이란 대상의 내적 생명활동을 표현하는 것이다. 옛 화가들에게 있어 대상의 내적 생명활동을 표현하는 것이란, 즉 끊임없이 변화하는 천지자연의 법칙과 합일하는 순환의식의 표현을 뜻한다. 따라서, 사생을 현대적인 언어로 풀어 말하면, 대상의 생명현상에 대한 본질적 측면과 그 작용을 포착하여 화면에 대상의 생명의식을 구성하고 표현하는 것이다. 동양의 전통적인 사유구조 안에서 그림은 단순한 외형만을 묘사하는 것이 아닌 대상의 살아 움직이는 생명의 모습과 그 생명을 생명답게 만드는 내적 율동성 혹은 원동력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동양의 전통적 인식체계 안에서 생명이란 어떻게 정의되는가.

동양의 전통적인 사유체계의 관점에서 보면, 살아있는 모든 만물은 기라는 단일한 요소와 구조에 의해 생명을 이룬다고 생각하였다. 기가 생명을 이루는 기초라는 생각은 더 나아가 생명체의 생명을 유지하는 원동력, 또는 생명체의 구조를 이루는 기본요소로 파악되었으며 기의 운행에 의해 만물이 형성되고 소멸한다는 생각에까지 이르렀다.

기의 운행은 또한 자연의 법칙을 따른다. 이것이 바로 理이며, 천지만물의 생명현상 배후에 있는 이치다. 이러한 생각은 물론 고대 중국인의 자연관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생명현상에 대한 이해는 우주자연의 순환의식에서 출발한다. ‘易’에서 ‘元亨利貞’의 ‘四德’은 춘하추동의 내적 이미지[象]이며, ‘春生夏長秋收冬藏’의 생명의 순환이다. 바로 생명의 질서, 곧 四時의 운행을 이르는 말이다.

천지의 근본정신은 사시의 운행을 따라 부단히 化生하는 생명이며, 생명의 창조는 우주의 가장 숭고한 덕목이다. 그러므로 생명은 진·선·미를 모두 아우르는 개념이다.
생명의 가장 기본 요소인 氣는 또 예술의 창작과 감상에 있어서 작품 평가의 중요한 준거가 되었다. 우리는 그림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氣韻生動이라는 말을 종종 쓴다. 대상의 형체를 아무리 잘 묘사한다고 한들 대상의 특질인 기를 나타내지 못한다면, 그 그림은 생기를 잃은 죽은 그림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모든 예술의 진정한 요소란 생명에 있다고 간주한 것이다. 우리의 옛 선인들은 생명에 대한 직관적 파악으로 예술과 도가 분리되지 않은 경계를 표현하려고 하였고, 생명을 모든 예술적인 감수성의 근원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말하면 이러한 생명에 대한 인식은 문화적 현상의 일부이다. 즉 인간의 주관적 인식이 부여한 의미라는 뜻이다. 문화현상이란 약속 같은 것이다. 약속이란 그 약속을 정한 사람들에게만 의미가 있다. 결국 예술이 국경을 초월한다는 말은 예술이 가진 기본적인 속성이 어느 사회, 어느 시대에나 비슷하게 적용된다는 말이지 모든 종류의 예술이 나라와 민족, 시대를 초월하여 의미가 있다라는 말은 아니다. 그림은 時空의 제약을 받는다. 그러므로 화가가 그림을 그리거나 감상자가 그림을 감상할 때, 화가의 체험과 표현된 그림 사이의 간극을 메워주는 것 역시 동일한 문화인식 안에서 가능한 일이다.

동양의 전통사유체계에서 생명에 대한 체험은 예술가의 기본적인 소양이다. 그러나 시간의 추이에 따라 변화하는 생명은 그 실체를 파악할 수 없다는 점에서 空이다. 그렇다면 포착할 수 없는 생명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직관에 의해 파악되는 도 또는 생명을 일반적인 보편논리에 근거해서 모든 사람이 같이 공유할 수 있는 체계화된 구조로 제시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지만, 이에 대한 합리적인 해석 없이는 동양학의 미래와 우리의 자주적인 학문의 확립 또한 불투명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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