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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마저 녹여버린 섬 또는 바다, 生의 애매모호함을 삼키다
詩마저 녹여버린 섬 또는 바다, 生의 애매모호함을 삼키다
  • 홍지석 객원기자·미술평론가
  • 승인 2010.05.31 15: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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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의 미학_ <5>] 박경리·전혁림 그리고 홍상수와 통영

한국의 나폴리로 불리는 통영. 그곳은 단순한 항구도시가 아니다. 통영은 문학과 예술의 깃발과 같은 이미지로 펄럭이는 곳이다.

출처 = http://image.tongyeong.go.kr

우리 현대미술에는 半抽象이라고 하는 독특한 영역이 존재한다. 추상이면서 동시에 구상인 작품, 또는 추상도 아니고 구상도 아닌 작품을 일컫는 말이다. 전혁림(1916~2010)의 그림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그의 그림은 추상적인 구성을 기조로 하면서도 거기에 부단히 자연적인 이미지가 출몰한다. 그 자연적인 이미지란 고향 통영의 풍경이다. 또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고향 통영의 풍경을 그린다. 하지만 그는 그 풍경을 즉자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추상적으로 묘사한다.

전혁림의 대표작 「한려수도」, 71 X 63cm,, 캔버스에 유채, 1983
미술평론가 오광수는 전혁림의 작품 세계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추상과 구상을 넘나들었다고 했지만 오히려 추상과 구상의 자유로운 침투현상이라는 말이 더욱 적절할지 모른다. 추상인가 하면 구상이고, 구상인가 하면 추상인 세계가 그의 예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화가 자신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오늘의 미술이 회화나 조각이나 건축할 것 없이 다양한 양식의 혼용종합으로 형성돼 있다. 한 작품 속에는 구상 추상 초현실 환상 포프 오브피칼몽타주 피칼코머니 등등의 양식으로 그려져 있다. 심지어는 기존 물품의 첨부이용 테크놀로지적인 표현까지 있으니 어떻게 그렇게 구분할 수 있으며 한계를 명확하게 그을 수 있었을까.”(1962년)

명확하게 한계지울 수 없음의 빛깔들

이렇게 명확하게 한계를 그을 수 없다는 것은 그가 그리는 통영(충무)의 지역적 특색이기도 하다. 통영 출신의 소설가 박경리(1926~2008)는 『김약국의 딸들』에서 고향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통영 주변에는 무수한 섬들이 위성처럼 산재해 있다. 북쪽에 두루미 목만큼 좁은 육로를 빼면 통영 역시 섬과 별다름이 없이 사면이 바다이다.” 그러니까 통영의 이미지는 사면이 바다로 이루어진 ‘섬’의 이미지다. 섬은 육지지만 육지가 아니다. 추상과 구상이 자유롭게 침투하는 전혁림의 그림처럼 통영에는 땅의 이미지와 바다의 이미지가 자유롭게 침투한다. 통영의 바다는 또 어떤가.

다시 『김약국의 딸들』의 한 구절을 인용해보자. “남해안 일대에 있어서 남해도와 쌍벽인 큰 섬 거제도가 앞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현해탄의 거센 파도가 우회하므로 항만은 잔잔하고 사철은 온난하여 매우 살기 좋은 곳이다.” 박경리가 묘사하듯 통영 바다는 잔잔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바다를 ‘호수 같은 바다’로 일컫는 것이다. 호수 같은 바다는 애매하고 모호한 바다다. 그 애매모호함 속에서 통영 작가들은 어떤 生의 진실을 목도한다. 1973년 『토지』 서문의 한 구절을 보자.

“사람들은 수월하게 행과 불행을 이야기한다. 어떤 사람은 나를 불행하다 하고 어떤 사람들은 행복하다 한다. …… 그들 각도에서 본 행·불행에는 각기 타당성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때론 노여움을, 때론 모멸감을 느끼며 그런 말을 듣곤 한다. 애매모호하기 때문이다. 무궁무진한 인생의 심층을 상식으로 가려버리는 것이 비겁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분류되는 불행, 그렇게 가치지어지는 행복이라면 실상 그 어느 것과도 나와는 인연이 있을 성싶지 않았다.”

생의 애매모호함을 목도하는 작가는 폐쇄적인 영역을 탐하고 구축하고 그 안에 안주하지 않는다. 전혁림의 그림에서 청색이나 청회색의 맑고 조용한 음색은 바탕을 이루고 황색이나 적색 같은 색채들은 감정을 고조시키면서 어느 모퉁이를 비집고 들어와 극적인 변전을 도모한다(오광수). 그의 그림에서 땅과 바다, 그리고 하늘은 ‘청색’을 행복하게 공유한다. 박경리의 소설에서는 하나하나의 주인공들이 짐 지고 살아가고 그러면서 넘어 가려고 무지무지하게 애쓰는, 그러면서 사랑이 있고 비극이 있는 모순구조가 나타난다(송호근). 한 대담에서 박경리가 폐쇄적인 영역을 구축하는 일, 소속되기를 꿈꾸는 일, 소유를 추구하는 일에 대해 강한 적대감을 피력한 바 있음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옛날에는 자연이 있는 그대로지만 ‘토지’라는 것을 연상할 때는 문서로 연상하거든요. 문서라는 것은 소유의 출발입니다. 소유의 출발에서 인간의 비극이 시작된다고 볼 수도 있지요. 인간의 비극뿐만 아니라 개인의 비극, 민족과 민족간의 비극, 국가와 국가의 비극, 전쟁, 모든 것이 소유개념에서 오는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인간에게 ‘토지’라는 문서에서 비롯된 소유개념, 이것이 오늘에 이르러서는 자본주의라는 형태로써 지구를 파괴에까지 이르게 하고 있거든요.” (박경리, 『가설을 위한 망상』, 나남, 2007, 294쪽)

패인 홈에 갇히기를 거부하는 작가

소유를 거부하는 작가, 달리 말해 패인 홈에 갇히기를 거부하는 작가는 정적인 것에서 동적인 것을, 동적인 것으로부터 정적인 것을 발견하는 작가다. 통영의 바다는 잔잔하지만 잔잔하지 않다. 불어오는 바람이 그 바다를 요동치게 한다.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휘날리는 깃발 앞에서 통영 출신의 한 시인은 오래 전에 ‘소리 없는 아우성’을 들었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 저 푸른 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 純情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 哀愁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 아, 누구던가. /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유치환, 「깃발」 全文, 1936)

그러나 생의 애매모호함을 직시한다는 것은 무정형을 찬양하는 일과는 거리가 멀다. 그들에게는 돌아가고 싶은 그리운 고향이 있다. 그러나 그 곳에 되돌아가지 못하기 때문에(또는 되돌아갈 수 없음을 잘 알고 있기에) 그들은 아프다. 김춘수(1922~2004)-이 시인 역시 통영 출신이다- 「꽃」의 한 구절은 이렇게 빛나듯 부대끼지 않던가.

“우리들은 모두 / 무엇이 되고 싶다 /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싶다” (김춘수, 「꽃」 부분, 1952)

통영을 배경으로 한 신작영화 「하하하」에서 영화감독 홍상수는 마치 김춘수와 대결이라도 하듯 성옥(문소리)과 정호(김강우)의 대화에 난데없이 꽃 논쟁을 끌어들인다. 선배 비평가에게 실존주의적 허세에 빠져 있다고 비판 받은 시인 정호는 성옥이 선물한 꽃 화분을 두고 화를 낸다. 그러면서 성호는 정옥에게 묻는다. 진짜로 그게 뭐냐고. 그러니까 ‘꽃’이라는 이름 붙여지기 전에 그게 뭐냐고. 왜 그것을 그렇게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냐고.

“네 눈을 믿고 네 눈으로 보라”

이 꽃 논쟁과 관련해 또 다른 주인공 문경(김상경)의 꿈속에 나타난 이순신 장군(김영호)의 다음과 같은 말씀은 의미심장하다. “그 눈으로 보아라. 그러면 힘이 저절로 날 것이다. 네 머릿속의 남의 생각으로 보지 말고 네 눈을 믿고 네 눈으로 보라.” 그러나 어쩌면 그렇게 마주대하는 실재는 아무 것도 아니거나 느닷없이 칼을 들고 덤벼드는 거지처럼 섬뜩하거나 할 것이다. 그럼에도 거기에 ‘좋은 것, 아름다운 것’이 있다.

박경리는 같은 대담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주 속의 나 그리고 나의 전후좌우를 살피는 것이지요. 생명이 그것의 핵이고 탄생과 죽음, 긍정과 부정이 서로 부딪는 생명의 모순-한을 덩어리째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토지』는 나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되는 얘기지요.”(박경리, 『가설을 위한 망상』, 336쪽)     

* 지난 5월 25일. 이 글을 쓰는 동안에 전혁림 화백이 세상을 떠났다. 향년 94세.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홍지석 객원기자·미술평론가  kunst75@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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