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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적 독서는 불가능하다” … 앎의 본질 건드리는 메타이론
“완결적 독서는 불가능하다” … 앎의 본질 건드리는 메타이론
  • 교수신문
  • 승인 2010.05.31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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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 폴 드 만 지음, 『독서의 알레고리』(이창남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0)

폴 드 만을 처음 알게 된 것은 필자가 석사과정을 마칠 무렵이었다. 90년대 중반에 국내에도 학문적 풍토가 조금씩 변해가고 있었고, 후기구조주의와 해체론이 소개되기 시작했다. 유럽이나 영미권을 염두에 두면 비교적 늦은 감이 있지만, 80년대 학생운동을 거쳐 좀 다른 사유를 모색하던 사람들에게 푸코, 들뢰즈, 데리다 등은 하나의 새로운 물꼬를 트는 지적인 흐름이 됐던 것 같다. 예일학파라고 불리는 일군의 학자들 속에서 드 만은 프랑스 후기구조주의의 지적인 흐름을 반영하면서 북미에서 미학적, 문학적 규범들에 대한 해체적 성찰을 주도했다.

당시 낭만주의를 주제로 연구하던 필자는 벤야민과 드 만의 낭만주의 연구를 접했다. 사실 석사과정시절 이들을 정확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다만 막연한 느낌이지만, 뭔가 상당히 심도 있는 연구방향이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 문학연구에서 작가연구나 작품연구도 의미 있지만, 벤야민과 폴 드 만이 보여주는 연구는 일반적인 문학연구와는 다른 이색적인 느낌이었다. 당시에는 이 느낌의 정체를 잘 알지 못했다. 다만 어떤 기존의 문학이라고 생각해왔던 틀을 벗어나 철학적 에피스테몰러지의 문제와 일정한 연관성을 지니는 것 같았다.

역사적으로 일정한 지식의 코드가 존재한다는 푸코적인 에피스테메 개념은 잘 알려져 있지만, 에피스테메는 지식의 구성에 대한 토대이론들에 따라 상이하게 정의된다는 사실을 알게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서였다. 독일에서 박사과정에 재학하면서 본격적으로 에피스테메 개념을 붙들고 있다가 결국 그 개념을 포기할까하는 무렵, 드 만의 『미학적 이데올로기』의 첫 논문인 「메타포의 에피스테메」라는 논문을 만났다.

벤야민과 드 만은 분명 그러한 에피스테메의 문제, 요컨대 지식의 근원에 대한 문제의식 속에 문학을 연구해온 大家들이다. 서로 다소간 편차가 있고, 여기서 자세히 거론하기는 어려우나 드 만의 경우 『독서의 알레고리』에서 주창하듯 문학은 일상 속에 일상적 담화의 행위 속에 존재하는 형상적, 수행적 언어이다. 그리고 그 언어는 수사학이다. 문학에 대한 이러한 규정은 물론 전통적인 에피스테메 연구와는 괘를 달리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적어도 학문의 ‘언어학적 전회’ 이후 일상 언어와 담화 속에 나타나는 이 수사적, 형상적 측면을 철학적 에피스테메에 대한 논의가 피해갈 수는 없다.

의미 구성과정에 대한 해체론적 접근


혹자는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트를 떠올릴지 모른다. 그러나 드 만에게 문학과 거의 동근원적으로 이해되는 수사는 말 꾸밈도, 능변도 아닌, 언어의 형상적이고 수행적인 측면이다. 이는 특정한 분과영역에 국한되는 어떤 학적 연구대상이 아니라 모든 담화적 실천 속에 나타난다. 문학을 분과학문의 틀 안에 가두는 태도는 전통적인 형식미학과 비평론들에서 비롯된다. 폴 드 만은 이러한 틀을 해체하고 있다. 그리고 그 틀을 해체하는 가운데 전통적 에피스테메의 구성에 대한 입장들과 논쟁적인 관점을 형성하고 있다. 이 책의 제1부 니체와 관련한 장들에서 젊은 시절 니체의 수사학 강의 노트를 다루는데, 특히 여기서 개념이 지닌 가상적 특성이 비판되고 있다. 개념은 사물을 바라보는 프리즘이고, 이 프리즘의 가상을 해체하는 것은 지식의 근원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수반하는 작업이다.  

여기서 특히 드 만이 비판하는 것은 개념과 사태를 혼동하는 것, 기호와 실재를 혼동하는 것으로 이는 그에게 일종의 이데올로기이다. 개념들이 지닌 임의성과 가상성의 베일을 벗기는 드 만의 작업이 ‘해체’라면, 해체는 비판적 독서의 일종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여기서 기호는 실재를 반영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기호 자체의 망 속에서 차이의 효과들을 통해 실제를 환기시킨다. 의미의 구성과정에 관한 이러한 해체론적 입장은 바로 일종의 지식에 대한 메타이론으로, 사물과 사태에 대한 앎의 본질에 비판적 물음이 되는 것이다.

“너 스스로 모른다는 사실을 알라”, “안다는 것(통찰)은 무지(맹목)를 동반한다”로 요약될 수 있을지 모를 드 만의 지식비판은 소피스트적이라기보다는 소크라테스적이다. 이는 학문적, 윤리적 담화들의 실천을 근본적으로 재고하게 만든다. 주지하다시피 근대적 지식에 대한 후기구조주의자들의 비판은 후기식민주의적 입장을 실천하는 스피박에게 이어진다. 스피박의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라는 논문은 제목만으로 하위주체에 대한 독서의 가능성을 부정한다. 말하지 못하는 주체들은 지성사의 그늘 속에 존재해왔다. 여성, 유색인, 동성애자 등등 지식과 도덕적 권위의 세계 속에서 침묵해왔던 이러한 비존재들의 존재는 서구중심적, 가부장적 문맥에서는 독서불가능했다. 이러한 독서불가능성은 이들에 대한 독서의 의지 즉, 스피박이 이러한 존재들을 읽어내고 복권시키고자 하는 의지의 맹아가 된다.

독일에서 귀국한 후 기회가 닿으면 『독서의 알레고리』를 번역할 기회를 바라고 있었다. 우연히 기회가 찾아왔고, 그 책의 12개 장을 12개월에 걸쳐 한 달에 한 장씩 옮기기로 마음먹었다. 그로부터 6개월 쯤 지나서, 그러니까 번역이 중반쯤 진행된 무렵 필자는 미셸이라고 하는 하버드 대학 박사과정생을 알게 됐다. 그는 자료조사차 한국을 방문중이었다. 그는 드 만에 대해 잘 알지 못했고, 해체론의 논리를 탐탁치않게 생각하는 편이었지만, 때로 난문에 가까울 정도로 어려운 드 만의 영어 문장을 정교하게 분석해내곤 했다. 간혹 그의 도움을 받으면서 작업을 진행하던 어느 공휴일날, 날씨는 화창하고 아름다운데 카페 한쪽 구석에서 드 만의 문장을 가지고 이야기하다가 문득 왜 우리는 이런 좋은 날 이런 사변적 문장에 대해 토론하고 있나 하는 말을 했다. 미셸은 “우리는 학자니까”라고 혀짧은 한국어로 대답했다.

언어의 한계와 번역, 그리고 학문


사실 필자는 번역자로서라기보다는 학문적 작업의 하나로 『독서의 알레고리』를 읽었다. 공부하는 사람에게 번역은 늘 낯설고 위험한 모험이다. 길지 않은 시간 이었지만, 그 모험의 동반자처럼 책을 함께 읽는 즐거움을 나눈 미셸에게 고맙다.

한국어를 모국어로 하는 그러나 영어와 독일어를 반평생 붙들고 살아온 나와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그러나 중국어와 일본어를 붙들고 살아가는 미셸은 서로 교차될 수 있는 외국어의 한계 속에서 만났다. 교집합을 이루고 있는 우리의 언어는 그 만남의 조건이자 토대였다. 마치 드 만에게 필요악인 언어가 삶의 조건이며, 독서는 그 언어의 한계 속에서 읽고 사는 일인 것처럼. 독자들 또한 자기 언어의 경계 속에서, 그리고 번역의 한계 속에서 이 책을 읽어(번역해)나가게 될 것이다. 그런 만남과 만남의 연쇄 속에 생산적인 불꽃들이 많이 번득일 수 있다면, 드 만에 대한 필자의 그간의 암중모색도 값없지 않을 듯하다. 

이창남 부산대·독문학

베를린자유대에서 박사를 했다. 저서로는 『아테네움 시대의 문학』, 『예술의 시대』(공저) 등이 있다. 현재 부산대 HK 로컬리티 인문학 사업단에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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