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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所를 찾았더니 거기가 世俗이더라!
聖所를 찾았더니 거기가 世俗이더라!
  • 홍지석 객원기자·미술평론가
  • 승인 2010.05.17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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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비평] 공간으로서의 미술관의 이중성

우리는 보통 미술작품을 보기 위해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찾는다. 그러나 거기서 우리가 보는 것은 작품만이 아니다. 우리는 미술관도 본다. 훌륭한 만찬에서는 음식의 맛만큼 상차림도 중요하다는 상식은 여기에도 적용된다. 즉 작품이나 전시도 중요하지만, 전시가 진행 중인 미술관 건물의 양태, 배치, 주변 환경들 역시 중요하다. 그릇이 달라지면 음식맛도 달라지듯이(!) 공간의 변화는 작품의 의미나 내용을 변화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먼저 신전, 교회, 사찰 또는 궁전을 닮은 미술관들이 있다.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이나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경기도 미술관, 예술의 전당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이 미술관에 들어가 미술작품을 감상하려면 많이 걸어야 한다. 우리는 널찍한 광장이나 길게 이어지는 언덕길을 걸어 미술관에 진입한다. 이 광장, 이 언덕길은 미술관 건물을 외부의 소음, 더 나아가 밖에 있는 세속적인 세계와 분리시킨다. 그래서 미술관을 찾는 일은 어떤 성스러운 공간을 찾는 일처럼 된다.

인사미술공간 ‘단비’전 전시 장면(위). 아래는 금호미술관 전경. 이 건물은 과천국립현대미술관을 설계한 재미건축가 김태수가 설계해 1996년 완공됐다.


사찰 건축에서 물과 다리(橋)는 큰 의미가 있다. 거기서 물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는 것은 세속에 더럽혀진 영혼을 정화하는 일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미술관 진입 과정에서 연못이나 분수를 반드시 지나치게 된다. 또한 이런 유형의 미술관에서는 대부분 계단을 강조한다. 부석사 무량수전에 다가가기 위해서 수많은 계단을 오르듯 우리는 미술관에 진입하기 위해 수많은 계단을 밟아야 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몸을 숙여야 하고 그만큼 공간에 대해 겸손한 태도를 갖게 된다. 그래서 미술사가 에머 바커는 이 계단을 ‘제의적 계단’이라 지칭하기도 했다. 여기에 어울리는 건물은 물론 화강석 같은 무거운 재료로 만들어진 육중한 건물일 것이다. 육중한 로마네스크 성당처럼 이 육중한 건물들은 미술관 관객들을 외부 세계와 차단하고 그럼으로써 그들이 편안한 마음으로 또 다른 (초월) 세계로 다가갈 수 있게끔 해준다.

‘제의적 계단’과 백화점 같은 미술관들


이런 유형의 미술관들은 지나치게 권위적이다. 더구나 이런 공간에서 작품과 작가는 별세계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세속과 분리된 육중한 건물은 그 자체 삶과 예술의 결정적인 분리와 단절을 나타내는 기표다. 그렇다면 이른바 백화점 같은 미술관 건축은 어떤가. 백화점 같은 미술관이란 비평가 크리스토프 그루넨버그가 뉴욕현대미술관(MoMA) 건축에 쓴 표현이다(사실 미술관과 백화점의 유사성에 대해서는 이미 벤야민이 언급한 바 있다). MoMA는 대도시 도로에 맞닿아 있는 백화점처럼 도시 한복판의 길가에 모던 양식으로 세워졌다. 건물 옆면에 큼지막하게 세워진 미술관 명칭은 보행자를 유혹하고 유리 벽면은 내외부를 개방해 친숙한 느낌을 준다. 우리 미술관 중에는 대학로 아르코미술관이나 통의동 대림미술관, 사간동 금호미술관 등이 이와 유사한 사례일 것이다. 그 내부는 어떤가. 여기서 작품들은 매우 선택적인 방식으로 미적으로 디스플레이됐다. 백화점에서 남성관, 여성관, 아동관, 스포츠관을 선택해서 쇼핑하는 방식으로 미술관 방문객들은 위 아래, 여기 저기를 선택해 즐길 수 있다.

이런 건물 역시 갖가지 방식으로 앞서 언급한 성소로서 미술관의 이미지를 유지한다. 비평가들이 화이트 큐브라 부르는 단순하고 깨끗하며 직선적인 내부가 바로 그것. 다시 에머 바커를 인용하면 작품이 적어지고 벽이 텅 비어갈수록 미술관은 더 성스럽게 된다. 그러니까 이러한 내부 환경은 미술이 돈이나 정치, 또는 이데올로기와 무관한 보편적·항구적인 정신영역에 속한다는 느낌을 고조시킨다.

백화점 같은 미술관 환경은 미술이 상품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면서 또한 감춘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자본에 속하면서 자본에 맞선다는 아방가르드의 오랜 딜레마를 함축해서 나타낸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좀 더 최근의 트렌드에 호소하는 근래의 미술관들은 이런 해묵은 난제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그들에게 성스러운 공간으로서의 미술관 이미지나 화이트 큐브는 너무 무겁고 진지해 보인다. 또한 그들은 최근에 유행하는 반짝이는 유희적인 작품에 좀 더 어울리는 공간을 제공하고 싶어 한다. 이런 유형의 미술관을 대표하는 것이 바로 파리의 퐁피두센터다.

퐁피두센터는 건물의 외부에서 건축의 내부구조를 노출한다. 여기에 밝게 채색된 파이프들이 덧붙는다. 그래서 이 건물은 그 자체로 유쾌하고 복잡한 미술 작품으로 보인다. 중요한 것은 이 미술관이 ‘미술관’이라는 명칭을 버리고 ‘센터’라는 명칭을 택했다는 점이다. 센터는 미술전시관뿐만 아니라 도서관, 영화관, 음악 센터까지도 아우른다. 해서 이 공간은 고요하기보다는 떠들썩하다. 그래서 많은 논자들은 퐁피두센터를 이종교배, 스펙터클로서의 미술관, 포스트모던 미술관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는다. 보드리야르가 시뮬라크르라는 문제를 다루면서 퐁피두센터를 중점적으로 언급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퐁피두센터처럼 노골적으로 기존의 미술관 이미지에 도전하는 미술관이 국내에 등장했다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퐁피두의 선례는 상업갤러리나 몇몇 실험적 대안공간의 건축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내외부의 건축구조를 노출한다거나 시선을 차단하는 기둥을 방치하거나, 작품보다 내부 인테리어에 시선을 돌리게끔 하는 장치들을 배치한 사례를 어렵지 않게 만나볼 수 있다.

성과 속의 팽팽한 대립 속의 가능성


물론 공간을 작가의 실험에 의탁해 변화시킬 수도 있다. 이를 확인하려면 원서동 인사미술공간에 가면 된다. 여기서는 지금 백정기 개인전 ‘단비 Sweet rain’(5월 7일~5월 23일)이 진행 중이다. 작가는 물과 사카린을 섞어 실제 단비를 제조했다. 관객들은 지하층에 내려가 이 단비를 맞을 수 있다. 1층에는 그 준비물인 우비와 우산, 장화를 빌려주는 대여소가 설치됐고, 2층에는 물과 사카린을 섞는 혼합기계와 물탱크 등이 설치돼 관객들은 지하에서 내리는 단비가 인공적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직접 볼 수 있다. 포스트모던 시대에 작가들이 공간을 어떻게 해석하는지를 보여주는 극명한 사례다.

윤난지 이화여대 교수의 말에 따르면 포스트모던 미술관은 “모던미술관이 애써 외면했던 세속적 맥락을 직시하고 나아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이용한다.” 성전의 외양으로 감추어져 온 세속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는 것이다. 윤 교수는 이 성과 속의 팽팽한 대립에서 미술관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고자 한다. 분명한 것은 ‘성소로서의 미술관’이라는 이미지가 지금 위기 상태라는 점이다. 어느 비평가의 어조를 빌려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속세의 고통과 비속함을 벗어나기 위해 성소를 찾아갔다. 그런데 놀라워라. 거기가 바로 세속이더라.

홍지석 객원기자·미술평론가 kunst75@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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