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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병합조약 전면 무효’ 선언 … 일본 보수 역사학계도 움직였다
‘한일병합조약 전면 무효’ 선언 … 일본 보수 역사학계도 움직였다
  • 우주영 기자
  • 승인 2010.05.17 11: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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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한일지식인 공동성명’ 발표 주도한 김영호 유한대학 총장

 

사진 = 우주영 기자
지난 5월 10일 한국과 일본의 지식인 200여명이 서울과 도쿄에 모여 1910년 체결된 한일병합조약의 원천 무효를 선언했다. 한일 병합조약은 일제 식민지 문제를 둘러싸고 두 나라의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지점이었다. 국내 학계에서는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국사학)가 한일병합 무효 주장을 펼쳐온 바 있지만, 지식인들 특히 두 나라 지식인이 한데 모여 공동성명을 채택, ‘한일병합 무효’를 선언한 것은 초유의 일이다. 이번 한일 지식인 공동성명으로 양국이 역사의 먹구름을 걷고 화합의 길로 나아갈지 관심을 모은다.

한국 측에서는 김영호 유한대 총장, 강만길 前 상지대 총장,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시인 고은 등 109명이 참여했다. 일본 측에서는 노벨상 수상작가 오에 겐자부로,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 미타니 다이치로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1기 위원장 등 105명이 동참했다.

김영호 총장(사진)은 이번 성명을 ‘역사의 천둥소리’에 비유했다. 한일병합의 불법성을 천명하는 일은 한일 간 산적한 역사 문제를 해결하는 출발점이다. 이번 성명을 주도한 김 총장은 한일 병합 조약 자체가 전면 무효라 선언하는 데 이번 성명의 핵심이 있다고 강조한다.

이번 성명에는 다수의 일본 지식인이 참여했다. 보수적인 일본학계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일까. 김 총장은 그렇다고 대답한다. “일본은 중국의 부상 이후 변하지 않으면 고립될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다. 아시아국가와 화해하는 것은 한국뿐 아니라 일본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이번 성명은 일본 정부가 한일 병합조약의 무효성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목표다. 양국 지식인들의 바람처럼 ‘한일지식인 공동성명’이 오욕으로 얼룩진 양국의 과거사를 청산하고 진정한 이웃으로 거듭나는 신호탄이 될 수 있을까. 동아시아 전체가 주목하고 있다. 다음은 김영호 총장과의 인터뷰 전문이다. 

△선언문의 핵심 내용은 무엇인가.
“이번 성명의 골자는 1910년 체결된 한일병합조약이 전면 무효란 것이다. 이 조약을 부정하지 않으면 일본의 식민통치는 합법이 된다. 식민통치가 합법인데 어떻게 사과를 요구하나. 이번 성명은 일제 식민통치의 불법화를 세계에 천명하고자 한 것이다. 조약을 무효화 하지 않으면 독도문제, 일본군 성노예 문제, 독립운동가 문제 등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

△선언문을 발표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 추진과정도 궁금하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 이후 문제의식을 갖게 됐다. 개정론도 많이 썼다. 일본에서 교수 생활을 오래했는데 개인적으로 만나면 일본 지식인들도 일제 식민통치의 부당함에 공감한다. 올해는 한일 병합 100년이 되는 해다. 한일 문제를 청산할 적절한 시기라 생각했다. 그래서 작년 12월 19일 도쿄에 가서 평소 친분이 있던 일본 학자들을 만났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바로 한일 학자들에게 전화를 걸어 동의를 구했다. 다음날부터 이틀간 성명서 내용을 두고 일본 학자들과 격론을 벌이며 대략의 윤곽을 잡았다.”

△우여곡절이 많았을 것 같다.
“한일 합방이냐 병합이냐 등 용어 하나를 두고도 갑론을박이 오갔다. 형용사 하나 때문에 서명을 철회한 학자들도 있었다. 성명서 발표가 채 일주일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여전히 마음에 걸리는 대목이 두 군데 있었다. “조약 체결의 절차와 형식에도 중대한 결점과 결함이 보이고 있다”는 대목의 경우 ‘중대한’이란 부분이 원래 ‘많은’으로 표기돼 있었다. ‘많은’은 단지 양적인 수에 불과하지만 ‘중대한’은 조약의 불법성을 다시 한번 못 박는 것이다. 또 “이에 대하여 한국 정부는 ‘과거 일본의 침략주의의 소산’이었던 불의부당한 조약은 당초부터 불법 무효이라고 해석하였던 것이다”란 부분에서 ‘불법’도 없는 말이었다. 이 두 부분을 고치기 위해 5월 7일 금요일 일본으로 날아갔다. 바꾸자고 하니 일본 학자들의 안색이 굳더라. 그럼에도 물러 설 수 없었다. 결국 담판을 짓고 일요일에 돌아와 다음날 수정된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런데 이 부분 때문에 일본 측 거물급 인사 2명이 성명을 철회했고, 망설이던 사람 몇 명도 끝내 성명을 거절했다.”

△일본 역사학계는 여전히 보수적이다. 향후 일본 학계에 어떤 파장이 예상되는가.
“진보 쪽 지식인이 조금 많기는 하지만 보수적인 학자도 다수 참여했다. 일본 역사학계가 보수적인 것은 맞지만 변화의 조짐도 존재한다. 비단 한국뿐 아니라 아시아 국가들과 화해하지 못하면 일본은 존경받는 국가로 설 수 없다. 중국의 부상은 일본에게 큰 위협이다. 때문에 지금 일본이 변하지 않으면 고립될 것이란 위기의식이 일본 학계에 공감을 얻고 있다. 처음 100명을 목표로 서명을 시작했지만 예상외로 많은 학자가 참여했다. 일본 학계 역시 이번 성명이 한국뿐 아니라 일본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점을 인정하는 바였다.”

△이번 성명이 어떤 결과로 이어지길 기대하나.
“지식인 성명은 법과 같이 강제력이 있는 게 아니다. 그러나 한일 문제의 전문가들이 양국에서 200명 이상 모여 같은 소리를 냈다. 전문가들의 외침을 사회가 외면할 수 있겠나. 한일 정부 대표가 모여 다시 공동 선언을 해야 한다. 일본 총리가 담화를 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식민통치의 부당성과 한일병합조약의 무효성을 일본 정부가 인정하고, 사과해야 한다.”

△한일 역사문제와 관련해 국내 학계의 과제는 무엇일까.
“시바 료타로는 근대 이후 일본 국민의 역사의식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작가다. 그의 작품 『언덕 위의 구름』(1991)이 한일병합 100년을 맞아 드라마로 제작돼 방영 중이다. 그는 일본이 러시아의 남하를 막아내고 메이지유신을 성공한 것을 대단히 높게 평가한다. 그러나 이미 많은 일본 학자가 러시아의 문서를 바탕으로 시바 료타로의 주장이 허구라는 점을 밝혀냈다. 그러나 국내에서 이런 연구는 이뤄지지 않는다. 애국심에 기대는 것은 국내를 벗어나면 아무 설득력도 얻지 못한다. 한일 양국을 넘어 동아시아 전체를 아우르는 역사인식과 이를 뒷받침하는 연구가 필요하다.”

우주영 기자  realcosmos@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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