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停年 뒤 찾아온 우연한 기회 … ‘자기만의 삶’으로 갈아꼈다
停年 뒤 찾아온 우연한 기회 … ‘자기만의 삶’으로 갈아꼈다
  • 최성욱 기자
  • 승인 2010.05.10 16:4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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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퇴임교수가 사는 법

점점 더 빠듯해지는 대학 여건, 소용돌이치는 대학 정책의 변화 속에서 다시 ‘스승의 날’이 찾아왔다.
선인들은 가슴 따뜻해지는 ‘스승’의 향기를 늘 가슴에 품고 학문에 매진한 것으로 전해진다. 오늘, 교수의 눈에 비친 스승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정년퇴임한 교수들은 또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퇴임 교수 두 분의 살아가는 모습을 찾아봤다.
예전처럼 전면에서 주목받지는 못해도 그들은 저마다의 영역에서 새로운 학자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었다.  카네이션 향기가 가득하다.

원우현 KDI 국제정책대학원 초빙교수
정년퇴임을 65세로 잡는다면, ‘60세 진입’은 교수에게 새로운 삶의 철학을 요구하는 시기다. 이때부터 교수들은 수십년간 몰두해온 연구주제를 연구실에 남겨두고 떠날 준비를 한다. 자신과 주변 인물의 삶에 관심을 가지면서 ‘학자의 삶’ 2막이 시작된다. 대체로 연구주제는 건강, 취미, 가정의 행복 등이다. 전공분야를 막론하고 인문학에 귀의하는 셈이다. 혹자는 주부들을 대상으로 한 행복특강(?)에 나서는 원로교수들을 향해 ‘전문성 낭비 아니냐’는 혀찬소리를 던지기도 한다. 원로교수들은 그러나 “은퇴하기에 65세는 너무 ‘어린 나이’”라고 말한다.

사람의 수명은 길어지는데 정년은 짧아지는 추세다. 자의든 타의든 ‘은퇴하면 곧 퇴물’이 될 것이라는 통념이 불안을 배가시킨다. 그러나 스승의 날을 맞아 <교수신문>이 만나본 퇴임교수들은 ‘따로 또 같은’ 모습이었다. 그들의 열정과 패기는 여느 신임교수 못지않으며 밤 늦도록 진행된 인터뷰 내내 목소리는 카랑카랑했다.

당연시 했던 강의시간 “이렇게 소중한걸”

“재미삼아 바닷물에 발을 담갔는데 그 물에서 헤엄치고 물고기 잡는 느낌이랄까요?” 원우현 KDI 국제정책대학원 초빙교수(68세, 매스커뮤니케이션)는 퇴임 후 3년을 이렇게 평가했다.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원 교수는 전공분야를 바꿔 교수가 됐다. 학부 졸업 즈음 우연한 기회에 영어공부도 할 겸 원어강의 ‘저널리즘과 매스커뮤니케이션’을 수강했다. 학문적인 매스미디어를 통해 사회를 조명하는 데 매료된 원 교수는 그 길로 매스미디어 분야 대학원에 진학했다. 매스미디어의 법과 문화, ‘광고 PR’ 등을 연구주제로, 33년간 신문방송학과 교수생활을 했다. 관련 분야에서 활동도 왕성했다. 각종 학회장, 협의회장 등을 두루 거쳤고, 자신의 출연금으로 장학기금도 만들었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고, 예순에 접어든 원 교수도 앞으로 어떤 취미를 갖고 여생을 보내야할지 고민하는 나날을 보냈다. 그렇게 정년퇴임을 2년 앞둔 2005년, 원 교수에게 우연한 기회는 또다시 찾아왔다. 고려대 창학 100주년을 맞아 언론홍보대학원장과 학부장에 임명된 것. “학과 교과과정 개편부터 교수임용, 홍보 등 정신없는 시간이었다. 뒤늦게 학문 현장과 흐름을 읽어내는 일을 해야 했다.” 정년을 코앞에 두고 보직을 맡은 원 교수는 “새로운 대학현장에 몰입하게 되면서 신임교수 시절의 분위기에 빠져드는 느낌이었다”고 회상했다.

원 교수는 2007년, 정년퇴임하자마자 KDI 국제정책대학원 초빙교수로 임용됐다. 임용조건은 사례위주의 수업과 100% 영어강의였다. 첫 학기에는 광고 PR분야에서 저명한 미국 학자가 쓴 책을 영어로 가르치는 데 주력했다. 영어강의 자체만으로도 벅찼지만 문제는 한국사례가 턱 없이 부족하다는 데 있었다. “철 지난 미국 사례로 수업의 생동감을 기대하긴 어려웠고, 가르치는 입장에서도 점점 감이 떨어진다는 것을 느꼈다.”

이듬학기부터 원 교수는 한국사례를 발굴해 영어 번역 강의안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 원 교수의 말을 빌리면, 책을 쓰듯 강의안을 준비하니 금세 책 한권이 만들어졌다. “전공을 바탕으로 새로운 강의를 개발했는데 인접학문 분야에서 교과목으로 채택했다. 낯선 환경에서 강의하다보니 매시간 세심하게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원 교수는 올해 미국 캘리포니아대(샌디에고) 초빙교수로 출강하면서 ‘도요다 리콜사례’를 연구하고 있다.

책을 내고 해외 초청강연의 기회도 잡았지만 퇴임 후 원 교수가 무엇보다 절감하는 것은 강의의 소중함이다. “지난 30년, 나는 가르치고 학생들은 내게 찾아와 물었다.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했다. 강의실과 학생, 그리고 강의시간을 부여받았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를 이제야 깨닫고 있다니!” 원 교수는 멋쩍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재밌는 연구, 재밌게 하면 그만”

어느 덧, 정년퇴임 7년 차에 접어든 이동녕 서울대 명예교수(72세, 재료공학부). 그런데 어쩐지 이 교수의 연구실은 아직도 퇴임이 멀어 보인다. 강의만 없을 뿐, 연구에 매진하는 이 교수의 일상에 큰 변화는 없다. 일단 오전 9시 출근에 오후 6~7시 퇴근이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연구실을 벗어나지 않는다. 이 교수의 출·퇴근은 토요일까지 이어진다.

연구기자재 때문에 대개 동료교수들과 공동과제를 수행하지만 개인연구도 결코 만만치 않다. 이 교수의 연구 일정은 매년 서너 차례씩 참가하는 국제학술대회에 맞춰져 있다. 국제학술대회를 구실로 빠르게 변하는 산업·기술 동향을 살피고 최신의 연구주제를 다루려면 주말 강행군이 불가피하다.

특히 국제학술대회는 이 교수에게 연구 동기를 북돋는 신선한 자극제다. 일흔을 넘긴 나이에도 두세 달 간격으로 논문을 발표한다. 퇴임 후 연구활동을 꾸준히 이어가는 비결로 ‘동기’를 첫손에 꼽는다.

공교롭게도 그에게 ‘동기’는 퇴임 첫해에 찾아왔다. 이 교수는 미국에서 열린 금속재료학회 학술대회에서 논문 3편을 발표했다. “퇴임 교수가 국제논문 3편을 발표한다는 데, 나 딴에는 ‘이 정도면 많이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어진 발표자로 미국의 한 老교수가 올라왔다. 몰골이 호리호리하고 건강도 썩 좋지 않아 보였다. 80세가 훌쩍 넘은 老교수는 이날 무려 4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당시 이 교수는 “그 老교수에게 정년은 없어 보였다”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재밌는 학문을 그저 재밌게 해나가면 그만인데, 너무 복잡하게 고민했던 것은 아닌가…”

이 교수는 정년퇴임 3년 6개월 전 ‘국가지정연구실’에 선정돼 연구책임자로 연구실을 꾸려나갔다. 5년짜리 사업이라 정년퇴임 후 1년 6개월은 책임연구원(신소재공동연구소)으로 지내기도 했다. 이후에도 동료교수들의 제안을 뿌리치지 못해 7년째 연구실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이 교수는 “권위와 체면을 벗어버리고 연구 그 자체에 집중하면 젊은 학자들과 연구할 수 있는 기회가 (생각보다 쉽게) 찾아온다”고 귀띔했다.

동료교수, 기업체에서 공동연구 제안이나 자문의뢰를 받으면 거절하는 일이 없다. 시간을 쪼개 쓰더라도 일단 받아 놓고 고민한다. “젊은 교수들과 최신의 주제로 공동연구를 해도,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는 나만의 시·공간적 환경을 활용해 역할을 찾는다.”
이 교수는 노후를 대비한 특별한 계획이 없다. 그저 자신의 연구분야에서 ‘더 이상 할 것이 없다’는 순간이 찾아오면 ‘기본서’를 저술하겠다는 게 전부다. 이 교수는 “막연한 계획뿐”이라며 민망해했지만 그만큼 그는 지금도 연구 주제에 깊이 몰입해 있다.

원 교수는 퇴직을 뜻하는 ‘retire’를 ‘타이어를 갈아 끼는 시기’에 빗댄다. 이런 점에서 두 교수는 닮은 데가 있다. 우연한 기회를 자기만의 삶으로 ‘갈아꼈다’는 점이다. 자신의 연구분야에서 독보적인 성과를 내는 데 젊음을 바쳤지만, 교수가 강단을 내려오면 학자로서 존재감도 사라진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불현듯 이들의 100세가 궁금해진다. 최근 임용된 신임교수들이 지금 이들의 나이가 되면, 학자들은 대학 안에서 또 어떤 다른 꿈을 그리며 살고 있을까.

최성욱 기자 cheetah@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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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호 2010-05-12 18:30:45
끝없는 학구열에 존경을 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