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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 ‘시장’에서 길 잃은 교수들
[문화비평] : ‘시장’에서 길 잃은 교수들
  • 김진석 / 인하대
  • 승인 2002.05.0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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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5-01 13:50:51

김진석 / 인하대·철학

금융위기 이후 지난 몇 년 동안 교수신문에 실린 교수들의 글 중에 가장 많이 나온 발언은 ‘시장이 교육을 망치고 있다’일 듯하다. 세계질서를 교란시키고 있는 미국 중심의 신자유주의, 그리고 그 와중에서 병들고 있는 교육 현장을 돌아볼 때 그 말에 정곡을 찌르는 점이 있기는 있다. 그러나 나는 너무 자주 똑같은 모습으로 반복되는 이 판단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다. 왜냐하면 부분적으로는 맞지만, 자칫하면 그 진단은 공허하고 상투적이 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우선 짚고 넘어갈 점. 신자유주의에 비판할 점이 적지 않고, 탈현대 경향이 말로는 다양성을 외치지만 정작 정치적으로 신보수주의에 빠지기 쉽다는 점은 사실이다. 90년 대 초 탈현대 사상을 이 땅에서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긍정적 방식으로 실천할 수 있다고 개인적으로 믿었고 지금도 일정하게 믿고 있는 나로서는 특히 반성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또 한국에서 거의 20세기 내내 자유주의가 제대로 실천되지 못했으며, 오히려 반공 이념의 탈을 쓰고 좌파적 사고를 억압하는 데 남용됐다는 것도 사실이다. 더 나아가 그런 상황에서 자유주의적 사고를 가졌던 사람도 어쩔 수 없이 액면 그대로 자유주의를 주장하지 못하고 때로는 민족주의적 혹은 사회주의적 실천으로 그것을 대체했으리라고 믿는다. 따라서 그 연장선에서 현재 한국 사회에서 좌파적 사고가 진보적으로 사용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는 것, 또 기본적인 복지와 기회 차원에서 무엇보다도 사회(민주)주의적 평등성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또 말로만 민주주의를 외치면서 국제적으로는 전혀 민주적이지 않은 미국적 ‘세계화’에 반대하는 구체적이고도 실천적인 반세계화 실천들 혹은 ‘다른’ 세계화 실천들에는 적극 동의한다.

그러나 시장을 공허하게 부정하는 교수들의 태도를 신뢰하기 힘들다. 더구나 이미 지적 상징자본의 직·간접 수혜자이면서, 맹목적이고도 이중적인 방식으로 ‘시장이 교육을 망친다’거나 ‘교육은 시장과 양립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추상적 근본주의 혹은 맹목적 도덕주의다! 보이지 않는 시장의 손을 무작정 신봉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지만, 시장의 역할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도 필요하다. 시장이 상품화를 부추기는 면이 분명히 있지만, 상품화 자체가 아니라 극단화된 상품화가 문제일 것이다. 또 상품화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근대적 평등성과 민주적 개인주의를 구성하는 데 부분적으로 기여했다고 할 수 있으며, 전근대적 관습과 국가주의를 견제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모든 학생을 획일적인 기준에 따라 일률적으로 경쟁하게 하는 학벌 및 입시체계에는 단호하게 반대하지만, 시장경쟁 자체를 맹목적으로 배제하는 교수들의 관념성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정말 부정적 경쟁을 극복하고자 한다면, 실질적인 대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대학별 종합 서열을 철폐하고, 서울대에 대해서도 소르본느 대학처럼 ‘분할’ 같은 획기적인 방안을 모색하며, 심지어 기본적인 학부 교육을 평준화시켜야 할 것이다. 또 국가가 지적 능력을 갖춘 학생들을 무상으로 대학까지 교육시키도록 하자. 또 그런 포괄적인 복지체계를 위해, 모든 시민이 수입의 절반 가까이 세금을 내도록 하자. 이것을 실천하지 못할 때, 교육 자본주의는 실질적으로 가속화될 것이다.

그러나 그 나머지 영역에서는 학생들도 경쟁해야 하고, 교수들도 학문적으로 경쟁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 인문학의 위기나 이공계 위기 이야기만 나오면 교수들은 지원을 요구하는데, 국가로부터 받는 지원에 대해서는 그렇게 관대하면서 시장은 왜 백안시하는가. 솔직히 말하자면 시장을 배제할 일이 아니라, 오히려 지원 받는 연구자들이 정말 경쟁력 있는 업적을 내는지 냉정하게 점검할 일이 아닌가. 또 기업 중심의 이해관계가 맹목적 경쟁을 부추기는 점이 분명히 있지만, 시장을 넘어선 ‘객관성’을 요구하는 교수들이 실제로는 지원만 요구한 채 제대로 된 교육시장을 위해 구체적이고도 솔직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 것도 유감이다. 논의를 사회적 차원으로 확장하자면, 기본적인 기회 균등의 차원에서 전근대적 ‘차별’은 철폐되어야 하지만, 나머지 영역에서는 납득할 수 있는 ‘차이’의 기준을 설정한 후 솔직하게 시장과 경쟁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이 두 영역을 혼동할 때 혼란과 기만이 생긴다.

그저 현실을 인정하자는 말이 아니다. 이미 시장과 경쟁을 통해 상징적 자본을 확보한 교수들이 이중적이거나 기회주의적 방식으로 그것들을 부정하는 일은 기만적일 수 있다. 물론 그들은 도덕적 명분을 가진다. 여기서 필자는 교수신문 지난 호에 발표된 지식인 집단(관료, 경영인, 언론인, 교수 등)의 상호평가 결과에 눈길이 간다. 스스로 우수한 전문가임을 자부해온 교수들이 전문성과 사회 공헌도에서 경영자에게 밀리고, 대 국민 영향력에서는 최하위라는 것이 과연 놀라운 일일까. 다만 도덕성에서 교수 집단이 우월하다고 한다.
그러나 지식인의 도덕성은, 그가 정말 청빈하든지 아니면 현실 문제에 아프게 고민하면서 구체적인 대답을 제시할 능력이 있을 때 비로소 밝은 빛을 발하지 않을까. 그와 달리 명분으로만 시장 경쟁을 초월하려는 도덕성은 건강하지도 못하며, 오히려 지적 상징 자본의 기만적 무기에 불과한 게 아닐까. 현실을 냉정하게 분석하지도 못하고 실천적으로 바꾸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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