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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시대의 고민을 가지고 古典 재해석해야”
“자기 시대의 고민을 가지고 古典 재해석해야”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0.04.26 13: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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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번역된 철학 착종된 근대』 공저자 전호근 민족의학연구원 편찬실장

사진=최익현 기자

『번역된 철학 착종된 근대』(전호근·김시천 지음, 책세상, 2010)의 부제는 ‘우리 시대의 동아시아 고전 읽기’다. 부제가 말해주듯 이 책은 서양 고전이 아니라 ‘동아시아 고전’을 대상으로 하되, ‘우리 시대’에 사상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 문헌들을 범위로 잡고 있다.

첫째마당에서는 근대적 삶의 공간에서 ‘고전’ 번역 문제를 다뤘다.『논어』와『노자』가 근대시기에서 최근 까지 어떻게 번역, 해석돼 왔는가를 탐사했다. 둘째마당에서는 ‘전통’ 창조와 번역된 근대 문제를 제기했다. 儒學의 전통 안에서 『장자』를 껴안은 행위, 연암 박지원의 번역 문제, 서구 동양 철학 연구서의 번역과 근대성 등 매력적인 주제를 향해 돌진했다. 책 분량은 얼마 되지 않지만 內波의 힘이 만만치 않다.

서양=근대의 문법에 익숙한 독자들에게는 동아시아 고전이 대안으로 제시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하지만, 책 전체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은 이 ‘동아시아 고전’을 읽어내는 방식 속에도 ‘식민성’이 틈입해 있으며, 이에 대한 철저한 성찰과 반성이 필요하다는 것으로 정리될 수 있다. 저자들의 문제의식은 이렇다. “우리가 『논어』든『노자』든 어떤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그 자체가 번역이자 해석의 행위이며, 바로 거기에 철학과 시대정신이 개입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서구와의 조우 이후 ‘근대성’을 추구해온 지난 100여 년의 철학과 학문이, 고전학의 영역에서는 그 자체로 ‘번역된 철학’이며 동서고금이 섞일 수밖에 없는 ‘착종된 근대’라는 인식을 공유하게 됐다.”

전호근 민족의학연구원 편찬실장과 김시천 인제대 의과대학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가 의기투합한 것은 오래 전이다. 이들은 10여 년을 함께 동양고전 텍스트를 읽으며 생각과 사유를 교류해 왔다. 그러다보니 학문 접근 방식은 달라도 학문적 사유는 서로 닮아 있음을 발견했다. 그러니까 이번 상재한 책은 이런 공부와 번역 과정의 ‘서로 닮음’의 확인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원전 번역이 그동안 상대적으로 저평가되고 소홀하게 취급된 데는 우리 학계의 지적 사대주의, 원전 숭배주의, 전문가주의가 작용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학문의 자생력과 자주성을 기르기 위해 원전 텍스트를 우리 언어로 옮겨놓는 일은 반드시 거쳐야 하는 작업이다. 그럼에도 현실의 학문 현장에서는 지적 사대주의와 원전 숭배, 그리고 전문가주의의 단단한 벽 때문에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실제 번역서를 참고하면서도 번역의 중요성을 간과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경시하기조차 한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번역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 정당한 평가가 제대로 이뤄질 수 없었다. 지난 14일 서울 서교동에 있는 한국철학사상연구소에서 전호근 편찬실장을 만났다. 

 

△ 이번 책은 10년의 고민을 담았다고 들었다. 어떤 번역관을 갖고 있나.


“원전과 독자 사이에서 고민하는 존재가 번역자이다. 독자 이해에 주안점을 둘 것인가, 원전 의미 전달에 주력할 것인가. 나는 독자들 쪽으로 향해가는 입장이다. 두 가지 다 충족해야 하는 게 어려움이다. 다른 언어, 다른 문화를 우리 것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우리 것이라 하더라도 과거 것을 현재의 것으로 바꾸는 과정은 이중의 고통일 수밖에 없다. 완벽한 번역은 머릿속에서 가능하지만 현실에서는 불가능하지 않을까. 늘 어떤 독자를 선택할 것인가 번역에 앞서 고민한다. 기존에는 같이 공부하는 동료들을 우선적인 독자들로 상정했지만, 지금은 전문적인 소수를 넘어서 다수와 대화하는 방향을 지향하고 있다. 한마디로 번역은, 원전에 집착하기보다 당대를 함께 사는 대중과 소통하는 것이고, 스포츠에 비견한다면 마라톤이다.”

 

△ 공동저서를 내기란 쉽지 않은 일인데, 이 책은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었나.

“이 책에서는 유가문헌과 노장을 같이 다뤘다. 우연이라기보다는 뭐랄까, 같은 한철연에서 공부하다보니 필연적으로 생긴 결과 아닐까. 이곳은 서양철학, 동양철학 등 다양한 연구자들 뒤섞여 있는 공간이다. 노장, 양명학, 함석헌, 유영모 연구하는 사람들 모여 있는 곳이다. 한 전공에 국한되지 않은 연구자들이 모였고, 같은 동양철학이더라도 유가철학, 노장철학 간의 소통이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다른 학회와 다른 점이기도 하다. 공부하는 곳의 영향 탓인지 전공과 함께 인접한 학문 영역까지 함께 탐구하게 됐다. 나는 유가철학을 전공했다. 특히 異端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16세기 조선성리학을 전공했다.

김시천 교수는 노장철학 전공자다. 다른 곳이라면 우리 두 사람의 소통은 자유로울 수 없다. 지난 10년 서로 의식하면서 공부해 왔다. 내가 하는 말이 저 사람에게 설득력이 있을까, 의심하면서 공부한 것이다. 처음에는 텍스트를 바라보는 시각이 달랐지만 10년 지나고 나니 서로 닮아가더라. 서로 닮았다는 걸 논문을 보고 알았다. 전공 영역이 다르지만 오히려 더 쉽게 소통되는 경험을 확인하면서, 같은 세계관, 비슷한 사유의 확장이라는 점에서 공동 저술을 기대해볼만하다고 판단했다.”

 

△ 공동저자인 김시천 교수와는 학문적 접근 스타일이 처음엔 달랐다고 하던데. 어떤 학문적 태도를 갖고 있나.

“나는 처음에 원전 숭배자였다. 번역된 2차 자료를 갖고 사유하는 것을 금기시했다. 원전 어렵다고 읽지 않고 2차 자료에 의존해서 원전을 파악하는 건 피해야 한다. 2002년 교수신문의 기획을 접하고, 생각이 서서히 바뀌었다. 원전의 중요성은 강조할 필요가 있지만, 지향점은 독자쪽으로 넘어갔다는 설명이다.

김시천 교수는 자료섭렵 방법이 남다르다. 영미권, 유럽권 자료를 주로 참고하는 스타일이다. 나는 동양권 자료를 주로 찾는다. 그의 탁월한 점은, 옆 동료들의 생각과 관심을 예민하게 파악해낸다는 것이다. 심포지엄 기획하거나 할 때 크게 도움 받고 있다. 누가 어떤 공부 하는지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전공영역뿐 아니라, 서양철학, 희랍철학, 의철학 분야 연구자들의 관심까지 파악하는 거 같다. 같은 시대를 사는 철학하는 사람들의 사유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는 건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본다. 이게 왜 중요하냐 하면, 우리의 경우, 선배 학자들 글을 잘 안보는 경향이 있다. 앞 세대라 할 수 있는 50~60년대 학자들 글조차 잘 안 본다. 이것은 자기 시대를 잘 모르는 한계를 초래한다. 고전은 아는데, 현대는 모른다, 문제가 있지 않은가.

한철연에서 2002년에 철학원전 번역 작업을 착수했다. 그때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 우리 앞 세대, 근대의 어귀에 어떤 사상적 풍경이 만들어졌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이 과정에서 최남선의 <소년논어>를 발견했다. 자기 앞 시대의 중요성을 재삼 인식했다고 해야 할까? 소크라테스나 주희 같은 이들은 자기 시대의 고민을 풀어나간 사람들이다. 주희는 앞선 시대 북송시대 유학자들인 주돈희, 소강절 등의 글을 보면서 주석을 남겼다. 거기서 주자학이 탄생한 것 아닌가. 앞시대를 통해 시대정신을 꿰뚫어본 결과다.

나는 주자학 전공자지만, 주희가 그랬던 것처럼 자기 시대의 고민을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자기 시대의 고민을 가지고 고전을 재해석해야지, 주자의 눈으로 주자의 고민을 갖고 주자학 해석하면 주자학 정신에 위배된다는 게 내 생각이다.”

 

△ 책 어딘가에 “원전의 절대성에 좌절하고, 독자의 몰이해 앞에 상심한 적도 있다”고 했는데 무슨 뜻인가.

 
“장자가 그렇게 어려운 줄은 번역하면서 알았다. 남이 번역한 책을 읽는다든가, 원전 일부를 읽는다든가 …… 편안하게 장자를 읽는 것과 완역 행위는 정말 다르다. 판본 상의 문제에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오류에 직면하면 절망할 수밖에 없다. 장자의 ‘제물론’,  그 문장은 정말 대단한 문장이다. 장자 그 자신만큼 사색의 깊이가 쌓이지 않아 이해할 수 없을 때 좌절 안할 번역자가 있겠는가. 마치 연주자가 악보의 맥락도 모르고 음표만 연주하는 꼴이다. 주체적인 독서가 되는 분은 공부해서 직접 ‘원전’을 돌파하겠지만 대부분 번역자에게 기댄다. 그러니 원전과 독자 사이에서 좌절이 깊을 수밖에. 또, 독자의 몰이해란 ‘자신이 번역하면 더 잘 하겠다’라고 평가하는 것을 말한다. 평가가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전개되거나, 우월적 위치에 있는 분이 인신 비난성 평가를 휘두를 때, 상심이 클 수밖에 없다. 모든 번역자가 겪는 상심일 수 있다. 그런 행위는 집필 행위, 번역 자체를 가로막을 뿐이다. 평가는 한 순간이지만, 번역은 잔재주가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번역은 마라톤과 같은 거다. 속일 수 없다. 능력이 받쳐주지 못하면 완주할 수 없는 것 아닌가. 번역은 늘 주저된다.”

 

△ 원전 숭배, 전문가주의, 지적 사대주의는 번역 문제에서 매우 복잡하고 예민한 사안인데, 지적 엄밀성과 전문가주의를 어떻게 구분하나.

“전통문화연구회에서는 가장 전통적인 방식으로 번역하고 있다. 가장 중요하게 내세우는 게 원전을 가장 정확하게 번역, 가능하다면 직역을 고수하는 건데, 이것을 지적 엄밀성으로 볼 수 없을까. 원문과 번역문을 대조시키는 방식의 번역이다. 뭐랄까, 음악시디를 만들 때, 악보를 같이 넣어주는 것과 같다고 하면 어떨까. 그런 목적으로 번역을 수행하는 게 필요하다고 본다. 이런 일이 제대로 되고 나서야, 대중과 만나는 작업이 가능하다. 요즘의 대중은 만만치 않은 존재 아닌가. 안목도 뛰어나다. 전문성 확보한 상태에서 대중과 소통 지향하는 게 맞는 방향이다. 주희의 경우, 자신의 주석을 죽을 때까지 고쳐나갔다. 『대학』주석 만들고 나서 그것을 죽는 순간까지 수정했다. 『대학』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가 ‘격물치지’인데, 주희는 63세가 돼서야 겨우 그 뜻을 깨우쳤다고 스스로 말했다. 학문은, 종교와 달라서, 한 번의 깨달음으로 뭔가를 획득하는 건 아니라고 본다. 학자에게 지식이란 경직된 그 무엇이 아니다. 지적 엄밀성은 평생 추구해야할 태도의 문제다. 원전 숭배와 전문가주의, 지적 사대주의는 이와 같은 지적 엄밀성과 배치되는 권위적이고 경직된 태도다.”

 

△ 번역 성과에 대한 우리사회, 대학의 평가는 여전히 인색하다. 이런 탓도 있겠지만, 번역이 만족스럽지 않은 건, 반드시 외부 조건 때문만은 아닌 거 같은데.

“우리보다 소득수준이 낮은 중국도 번역 평가는 엄정하다. 일본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동아시아의 근대어는 일본이 거의 독점한 것 아닌가. 민주, 공화, 자유 등의 언어를 보더라도 그렇다. 동양고전 쪽에서도 차이가 많습니다. 일본의 번역을 보면, 할 수 있는 건 어떤 것도 버리지 않겠다는 의지가 확고한 것 같다. 기록문화의 전통을 우리가 너무 쉽게 내팽개친 거 같다. 다양한 번역, 다양한 결과물 나오려면 아직 멀었다. 다산 정약용 같은 학자들의 글을 읽다보면 바닥에서부터 다진 지식임을 알 수 있다. 그런 전통이 오늘날 사라진 거 아닌가. 근대사의 불행과도 관련되는 문제지만, 성실성을 중심으로 학문하는 전통적인 풍토는 반성이 필요하다. 그걸 잃어버린 것 아닌가.

다행히 번역과 관련해서는 최근 고전번역원 등에서 자료 구비를 잘 해 놨다. 부산대, 동국대 등 전국 곳곳을 뒤져야 할 일을 지금은 간편하게 할 수 있게 됐다. 앞으로는 외부적 여건이 더 좋아질 것이다. 그러나 번역을 바라보는 인식은 좀 문제 있다. ‘번역은 3D업종’이라는 인식이 팽배하다. 막노동이 행위라는 것이다. 사회적 대우도 열악하다. 문헌정보나 서지학쪽도 굉장히 중요한데, 소홀히 하고 있다. 이런 것들이 번역 역량을 키워내지 못하는 조건을 만들고 있다. 신승훈 성균관대 교수는 서지전문가인데, 그분에게서 많이 배웠다. 문헌정리의 중요성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이런 여건이 갖춰져야 좋은 번역이 가능하다고 본다. 문화에 대한 통찰에서 번역이 꽃피는 것 아닌가.

대학측에 하나 당부하고 싶다. 대학측에서 좀 더 적극적으로 고전번역 사업에 참여했으면 좋겠다. 3D업종이란 인식이 팽배하면, 누가 번역에 매달릴 수 있을까. 학문적으로도 외로운 작업이 번역인데……. 그러나 번역의 결과로 학생들을 교육할 수 있는 자료가 생산된다는 걸 생각해보면, 번역에 대한 인식과 정책이 개선돼야 하지 않을까.

번역과 관련해서는 종신직도 생각해볼 수 있다. 대만 같은 곳에서는 번역 관련 ‘종신직’을 설치하고 있다. 종신이란 환경에서 좋은 학자들을 배출할 수 있다는 사회적 합의가 이뤄진 것이다. 장자를 번역하면서 입에서 ‘선생님!’ 소리가 절로 나오는 왕쑹밍 같은 학자들이 있다. 전직 관료들을 대학 석좌교수로 초빙하기보다 그런 명망 있는 재야 한학자들을 살펴보는 것도 방법이다.”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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