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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라는 詩魔, 아름답게 머나먼
시간이라는 詩魔, 아름답게 머나먼
  • 교수신문
  • 승인 2010.04.20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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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중견시인들이 돌아왔다

지천명의 나이를 넘긴 세 명의 시인이 최근에 시집을 간행했다. 최승호가 『고비』(현대문학, 2007)를 낸 지 3년 만에 열세 번째 시집인 『북극 얼굴이 녹을 때』(뿔)를 출간했고, 최승자는 『연인들』(문학동네, 1999년) 이후 무려 11년 만에 『쓸쓸해서 머나먼』(문학과지성사)이라는 시집을 들고 독자들에게 돌아왔다.그리고  조은은 『따뜻한 흙』(문학과지성사, 2003) 이후 7년 만에 네 번째 시집 『생의 빛살』을 출간했다.

시인은 왜 나이가 들어서도 시를 쓰는가. 이규보는 「詩癖」에서 칠십이 넘었는데도 시 짓는 일을 놓지 못하는 이유가 ‘詩魔’ 때문이라고 읊은 바 있다. ‘시마’ 때문에 그는 ‘몸의 기름기와 진액’을 다 빼앗기면서도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천형을 앓고 있다고 토로한다. 이 때문에 이규보는 「驅詩魔文」을 지어 시마의 다섯 가지 죄상을 낱낱이 밝히고 그를 멀리 쫓아 보내고자 한다. 시마의 다섯 가지 죄는 이렇다. 첫째, 시인으로 하여금 붓만 믿고 함부로 짓까불게 만든 죄. 둘째, 하늘의 이치를 파헤쳐 천기를 누설하면서도 당돌하여 그칠 줄을 모르며, 사람들의 마음을 꿰뚫어 세상을 놀라게 하는 죄. 셋째, 삼라만상의 천만 가지 형상을 닥치는 대로 하나도 남김없이 붓끝으로 옮겨내어 겸손할 줄 모르게 하는 죄. 넷째, 상 주고 벌 주기를 제멋대로 하며, 정치를 평론하고, 만물을 조롱하고, 뽐내며 거만하게 만드는 죄. 다섯째, 온갖 근심을 불러들이는 죄가 그것이다.


하지만 이규보가 말하는 시마의 죄상이란 결국 시마의 긍정적 의미에 해당한다는 것을 금방 짐작할 수 있다. 이규보는 그 때문에 스스로 시마를 붙잡고 있었던 것이기도 할 터이다. 최승호와 최승자가 등단한 지 30년이 넘었고, 조은 역시 등단한 지 올해로 23년째가 되고 있다. 그런데 세 시인이 지금껏 쫓아내지 못하고 있는 시마란 어떤 것일까. 이번에 간행된 시집들을 살펴보면 세 시인 모두 시간이라는 시마와 씨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최승호가 자신을 가리켜 “나를 지겹도록 의심했고 의심하는 나를 역겹도록 불신해 온 사람”(「라일락」, 43쪽)이라고 말한 것처럼 시인이란 끊임없이 자기를 부정하는 자이리라. 그렇다면 그 부정의 막다른 골목이 죽음이라는 점에서 시인이 시간과 대결하는 것은 어쩌면 필연적인 일일지도 모른다.

최승호는 첫 시집 『대설주의보』(1983)에서부터 지속적으로 ‘시간’에 대해 사유한다. 그는 자신의 삶을 반성하면서 “자궁 속의 강낭콩만한 胎兒가/ 부풀어오른 엄청난 육체./ 그리고 전진하는 나의 갱년기”를 벗어나 ‘0’ 혹은 ‘무’의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내 앞에 가없이 펼쳐진 時間의 개펄을/ 발바닥으로 걸어나가야 한다.”(「桶조림」)라고 다짐한다. 그렇게 그가 “가 없이 펼쳐진 時間의 개펄”을 걸어와 만난 것은 ‘혼돈’의 세계이다. 그것은 있고 없음의 경계가 사라진 최초의 시간, 빅뱅의 시간이다. 『북극 얼굴이 녹을 때』에 실린 「생일」이라는 시를 보자.

“내가 태어나기 이전의 혼돈에 대해 나는 무슨 말을 할 수 있는 것일까. 나도 없었고 나 아닌 것도 없었던 그 시절에, 없다는 말, 있다는 말,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는 말, 없지 아니한 것도 아니고 있지 아니한 것도 아닌 것이 아니다라는 말 따위가 무슨 혼돈의 쥐뿔이나 긁어대는 소리였을까.// 생일의 떡들, 둥근 케익들/ 내가 태어나기 이전의 혼돈을 기념하기 위해/ 촛불을 끄고/ 폭죽을/ 터뜨린다/ 빅뱅처럼// 펑!”(「생일」 전문)

최승호는 이 혼돈의 시간이 그것을 규정하는 무수한 말들을 넘어선 세계에 존재하는 것임을 깨닫는다. 하지만 여전히 질서 혹은 이성 혹은 언어의 세계에 몸을 담고 있는 시인으로서는 그러한 혼돈을 시로 형상화해 내기란 어려운 일인 듯하다. 「칸나」는 시인이 부딪힌 그러한 벽을 잘 보여준다. 어느 해 여름 제주도에서 시인은 현무암 돌담 아래 피어 있던 붉은 칸나를 보고 심한 충격을 받는다. “내가 칸나인 것처럼 쓰고 싶었다. 칸나 속으로 들어가서 칸도 없고 나도 없는 칸나의 마음으로 말이다. 칸나! 칸나는 말의 저편에 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글이 이렇게 갑자기 벽에 부딪힐 때가 있다.”(「칸나」)라고 썼다. ‘나의 마음’과 ‘칸나의 마음’이 일치하는 세계, 그것이 언어로 형상화될 수 있을까. 어쩌면 그것은 영원히 쓰여질 수 없는 시일지도 모른다. 

최승자 역시 첫 시집 『이 시대의 사랑』(문학과지성사, 1981)에서 부정한 시간과의 대결을 통해 행복했던 과거로 돌아가고자 하는 열망을 보여준다. 최승호가 그랬던 것처럼 그도 “주인 없는 해진 신발마냥” 시간의 ‘빈 벌판’을 헤매면서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눈 덮인 꿈속을 떠돌던/ 몇 세기 전의 겨울”(「청파동을 기억하는가」)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한다. 지금 여기에서는 “밤마다 복면한 바람이/ 우리를 불러내는/ 이 무렵의 뜨거운 암호를/ 죽음이 죽음을 따르는/ 이 시대의 무서운 사랑을/ 우리는 풀지 못”(「이 시대의 사랑」)하기 때문이다.

시간의 벌판을 헤매면서 행복했던 과거로 돌아가는 일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그는『쓸쓸해서 머나먼』을 펴내면서 “오랜만에 詩集을 펴낸다/ 오랫동안 아팠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그는 11년 만에 ‘비로소 깨어나’ 매우 가벼워진 모습으로 우리에게 돌아왔다. 물론 「시간은 武力일까, 理性일까」에서 말한 것처럼 세상은 여전히 ‘무력과 이성’의 시간 속에 놓여 있지만 말이다.

그가 “세월의 학교에서/ 세월을 낚으며 삽니다// 건너야 할 바다가/ 점점 커져 걱정입니다”(「세월의 학교」)라고 말할 때, 그에게서는 무거움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 그저 때를 기다리며 한가롭게 세월을 낚고 있는 강태공의 모습이 연상될 뿐이다. 그리하여 시간은 더 이상 문명의 시간으로 남아 있지 않다. “담배 한 대 피우며/ 한 십 년이 흘렀다/(중략)/ 다만 십 년이라는 시간 속을/ 담배 한 대 길이의 시간 속을/ 새 한 마리가 폴짝/ 건너 뛰었을 뿐”(「담배 한 대 길이의 시간」)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살아 있는 자가 모든 시간의 속박으로 벗어나 시간 속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문명의 시간으로부터는 자유로워질 수 있음을 최승자의 시는 보여주려고 한다.

한편, 조은은 1996년에 나온 두 번째 시집 『무덤을 맴도는 이유』에서 자신의 視線이 죽음에 매달려 있는 이유를 탐색한 바 있다. 그는 “내가 자꾸 무덤 곁에 오게 되는 이유/ 무덤 가까이에 몸을 둬야/ 겹겹의 모래 구릉 같은 하늘을 이고/ 나를 살게 하는 것들이/ 무덤처럼 형체를 갖는 이유”(「무덤을 맴도는 이유」)를 알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 이유를 알려고 하면 할수록 그는 자신의 한계에 부딪히고 마는 것이어서, “그러나 알고 있다, 오늘도 나는/ 내 봉분 하나 넘어가지 못한다”고 탄식한다.

그로부터 14년이 지나 조은은 『생의 빛살』을 통해 그 내면의 갈등을 어느 정도 극복한 듯 보인다. 생의 어느 지점에서 그는 모든 것을 불빛으로 감싸안는 “생의 빛살에 관통당한 것 같은”(「생의 빛살」) 느낌을 받는다. 그 느낌은 “겹겹의 흙더미를 뚫는/ 새싹 같은 언어를 갈망”함으로써 얻어진 것이다. 그 겹겹의 흙더미에 무덤의 이미지가 겹쳐지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울 터이다. 결국 그녀가 무덤을 맴돈 이유는 생을 온전히 끌어안기 위해서였던 것이리라.

지천명을 넘긴 세 명의 시인들, 그들이 시간이라는 시마와 싸워 귀가 순편해지고 마침내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하여도 행동이 법도에 어긋남이 없게 되기를 바란다. 그런 시인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살아 있는 독자에게는 더없는 기쁨이다. 그리고 최승호가 언어를 뛰어 넘은 자리에서 칸나와 소통했듯이, 시인과 독자가 언어를 뛰어넘어 행복하게 공감할 수 있다면 칸나의 세계를 충분히 드러내지 못했다는 최승호의 걱정은 기우로 끝날 수도 있으리라.

염철 문학평론가

필자는 중앙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북대 기초교육원 초빙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한국 문학권력의 계보』(공저)등이 있다. 현대시론을 전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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