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眞境文化의 예술사상적 근원을 읽다
眞境文化의 예술사상적 근원을 읽다
  • 유준영 전 이화여대 교수·철학
  • 승인 2010.04.20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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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_ 유준영 이종호 윤진영 공저, 『권력과 은둔』(북코리아, 2010)

기록유산은 희미해진 기억의 실타래를 풀어내 현재의 눈으로 과거를 반추하도록 한다. 유준영·이종호·윤진영이 함께 쓴 『권력과 은둔』(부제 조선의 은둔문화와 김수증의 곡운구곡)은 매우 특이한 저작이다. 17세기 문제적 인물 김수증과 그가 남긴 ‘곡운구곡’ 주변의 유산들을 읽어가면서 그의 ‘문예취향’이 당대의 진경시학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분석했기 때문이다. ‘구곡문화’로 표상되는 조선 문인지식인의 의식세계와 미의식을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이 책 『권력과 은둔』의 열쇠말은 유준영 전 이화여대 교수의 총론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저자들의 동의하에 유준영 교수의 총론 일부를 발췌 요약한다. 0

 

谷雲 金壽增(1624~1701) 형제들은 정치적으로 파란 많은 시대를 살아야 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국가와 개인의 위기가 그들 가문을 조선의 명문가로 성장시켰다. 김상용과 김상헌 두 조부의 후광에 힘입은 김수증 집안은 인조 말에서 숙종 초까지 권력의 주류인 서인에 편입됐다. 효종 사후 현종에서 숙종까지 왕권을 축으로 禮訟 논쟁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두 차례의 禮論 논쟁에서, 척신과 신·구 사대부 당파 사이에 심각한 권력 투쟁이 이어졌다. 서인정권은 남인을 사이에 두고 노·소로 분열됐다. 어린 숙종이 즉위하면서 ‘士禍와 換局’이 연이어 발생했다.

사화와 환국으로 사대부의 심리상태가 점점 불안해져 갔다. 막연하게 은둔을 꿈꾸고 실천하려는 움직임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지배이념이나 주류 권력에 반발하거나 반발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린 이들이 있었다. 그래서 스스로를 현실정치에서 소외시키는 ‘정치에서 거리두기’의 방편으로 은둔을 택했다. 이들 고급관료나 문인지식인들인 선비들이 ‘은둔문화’를 정교하게 가꾸어 갔다.

고급관료들이 중앙정권으로부터 일시적으로 격리 또는 축출되는 정치적 관행을 ‘流配’ 혹은 ‘放逐’이라고 한다. 이 말이 일상처럼 말해지던 시절엔, 그것이 번잡한 세속을 떠나 때로 자성하면서 학문적으로 진일보하는 계기를 마련해주기도 했다. 특히 독서 지식인인 고급관료 출신들은 이 기간 자연과 벗하며 독서 궁리에 힘썼다. 중국 유배문화의 예를 따라 ‘주역철리’에 침잠해 易에 대한 논설을 집필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백성들의 삶을 직접 돌아보며 민생을 위한 방도를 모색해 이를 기록으로 남기는 기회로 삼기도 했다.

조선 전기까지 新안동김씨의 후예들은 안동 향반으로 명맥을 유지해 갔다. 효종, 현종 그리고 숙종 연간 김수증과 그 형제들은 권력의 중심권에 있었으나 첨예하게 대립되는 당쟁 때문에 항상 불안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그들은 세상을 구하는 공을 세우는 것과, 공을 세웠어도 적당한 때 물러날 줄 아는 ‘出處去就’와 ‘修己治國’이라는 유가 선비들의 사회문화적인 윤리의식을 끌어안고 살아야 했다. 때문에 현달하면 할수록 마음으로만 산림을 동경하고 은자의 노래를 자주 불러야 했다.

김수증은, 세 살 때 친자를 생산하지 못한 淸陰 김상헌의 양자로 들어간 金光燦(1597~1688)의 장자이자 청음의 종손이다. 그런 연유로 어려서부터 두 동생 壽興, 壽恒보다는 조부를 가깝게 모시면서 특별한 훈도를 받았다. 그는 문과시험도 거치지 않고 음직으로 관직에 나아갈 때도 의식적으로 중앙 정치와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고 했다. 종손으로서 가통을 이어나가야 한다는 의식이 그로 하여금 세속을 벗어나 산수에 노니는 심성이 자라나도록 만들었다. 주로 외직을 맡았는데, 관할지역마다 모두 승경처가 많았으므로 자주 관아를 벗어나 명산을 유람할 수 있었다.

그는 두 조카 김창협, 김창흡과 함께 산천경개를 품평하는 山水遊紀를 짓고, 전래의 산수 시·문을 모아 『臥遊錄』을 편찬하기도 했다. 김수증의 산수 편력은 의식적으로 ‘권력에 대한 불안’을 떨치는 차원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갔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세속을 경멸하는 심리적 반동’이 크게 작용한 듯 보였다. 거기다 조부 김상헌으로부터 물려받은 산수를 좋아하는 성정이 한몫을 더했다. 그림이나 글을 통해 산수를 추상하던 와유의 틀을 깨고 직접 산수를 찾아서 산수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는 방식으로 선회했다. 그는 산천에서 노닐던 흥겨운 체험을 가슴에만 담아 두지 않았다. 문자를 빌어 자세하게 그려내어 후손들에게 보여 감상하도록 했다. 그리고 「곡운구곡도」 제작에서 보듯 ‘실경과 자아’를 주제로 내세우는 ‘眞境文化’의 선구를 시범했다.

김수증은 의식적으로 권력을 멀리했으나 끝내 권력의 장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다. 그는 옥사와 환국으로 점철된 난세를 자주 비분강개했지만 큰 명망을 지닌 세력가의 사손으로서 번잡하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도 없었다. 가문을 건사시켜야 한다는 책무가 어깨를 짓눌렀으나 시끄러운 도성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때마다 백악산 아래 북촌이나 양주 석실을 떠나 김수항의 별서였던 永平縣 백운산 아래 ‘洞陰’을 거쳐 화악산 자락 到馬峙 고개를 넘어 곡운으로 드나들었다. 그러나 세상은 그를 산속에 오래 머물지 못하게 했다.


1674년 ‘甲寅禮訟’으로 남인정권이 들어서자 서인들이 몰락 처지에 놓인다. 바로 동생 수항과 서인의 영수 송시열이 유배에 처해졌다. 김수증은 이듬해 성천부사를 그만두고 강원도 화천 ‘史呑’ 땅에 들어가 ‘籠水精舍’를 짓고 ‘제1차 은거시대’에 들어갔다. 그리고 주자의 ‘武夷九曲과 精舍經營’을 본받아 지금의 사내면 ‘용담 계곡’과 화악산 북쪽 일대인 속칭 ‘實雲’을 ‘谷雲’으로 고치고 ‘곡운구곡’을 경영한다. 구곡을 만들었으니 또 주희의 「武夷櫂歌十首」에 따라 차운시를 지어야 했다. 자신은 물론 자제, 친지들을 시켜 「곡운구곡차회옹무이도가운」을 짓게 했다.

1682년에는 평양 화가 曺世傑(1636~1705)을 곡운으로 불러들인다. 실제의 산천, 인물, 건물을 충실히 재현하는 이른바 ‘眞景山水圖’의 한 갈래인 「谷雲九曲圖」를 제작하기 위해서였다. 주자의 은둔시와 「무이구곡도가」가 퇴계·율곡 시대를 거치면서 한때 유행을 본 바 있다. 그런데 그로부터 1세기기가 지난 시점에 송시열과 김수증에 의해 구곡문화가 부활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볼 일이다. 아마도 여기에는 서인 노론계의 당파 혹은 학파의식이 일정하게 작용한 것이 아닌가 한다. 퇴계는 구곡을 경영한 바 없지만 율곡은 해주에서 고산구곡을 경영했다. 구곡시를 차운하는 것과 직접 구곡을 경영하는 것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 퇴계는 도산구곡을 설정하거나 「도산구곡가」를 짓지 않았다.

 

다만 주자의 「무이도가」를 차운하고 도산 주변의 승경을 한시로 읊었으며 교학을 위해 「도산십이곡」을 지었을 뿐이다. 반면에 율곡은 ‘고산구곡’을 경영했고, 한글로 「高山九曲歌」를 지었다. 이는 후학들에게 주자학의 적통이 율곡을 거쳐 송시열 대로 계승됐음을 표지하는 중요한 단서로 인식됐다. 이러한 전통을 계승하기 위해 송시열과 김수증은 의기투합했고, 김수증은 당대에, 송시열은 문인인 권상하 시대에 구곡을 실현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무슨 확고한 증거라도 만들듯이 김수증은 조세걸을 불러 ‘곡운구곡’을 사실적으로 그려내어 후세에 드리우게 한 것이다. 조세걸은 창령조씨로, 김상헌과 심양에서 볼모생활을 같이 한 척화 曺漢英(1608~1670) 집안과 연고가 있을 것으로 본다. 조한영의 손녀가 바로 김수증의 부인이기 때문이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노론정권이 다시 들어섰다. 김수항의 관직이 회복되고 군왕이 내려주는 제사를 받는다. 김수증은 그동안 쌓인 분노를 죽은 동생 김수항의 외손 李世白에게 험한 말로 울분을 터뜨리기도 했지만 세월이 흐르자 닫힌 은둔의 골짜기에서 일상으로 돌아가 평상심을 되찾아갔다. 주변의 자연과 산촌 화전민 그리고 승려의 환속까지 주의 깊게 살펴 기록하고 시를 지어 고독과 울적한 마음을 달랬다. 김창협 형제도 부친이 伸寃되자 비통한 심정을 다소 덜어낼 수 있었다. 이들은 오늘날의 덕소 아래인 ‘渼湖’에다 ‘渼陰別墅’를 재건한다. 미호는 교통이 편리하고 마음을 열어 아름다운 강산을 바라보기에 좋은 곳이었다.

여유를 회복한 듯이 김창협 형제는 ‘三洲三閣’과 ‘石室書院’을 거점으로 여항문인 홍세태 등과 시회를 갖기도 하고 찾아오는 문생들을 모아 강학의 자리를 열기도 하는 등 활발한 문예창작 분위기가 1700년 경까지 이어졌다.
김수증과 김창협 형제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이병연, 정선, 이하곤, 오원, 이덕중, 이용은, 홍길주, 정약용 등이 곡운을 찾았다. 이로써 곡운구곡은 노·소론은 물론 일부 남인까지 포함해서 금강산과 춘천의 소양강, 청평사를 오갈 때 들려야 하는 ‘은둔문화의 순례지’가 된 셈이다.

장종김문의 문예의식과 서화 취미는 선대 김극효에서 싹이 트고 아들 상용과 조카 상헌으로 이어져 김수증과 수항을 거쳐 이른바 六昌에서 꽃을 피웠다. 특히 김상헌이 공무로 여행하거나 산수를 유람하면서 얻는 遊紀나 寫境詩, 그리고 朝天 사행과 심양에서 구류돼 있을 때 교류한 명대 문인지식인들과 친분관계, 안동과 석실 서재에서 연마한 금석학과 서화 예술 취미가 후손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그 중에서도 김수증의 도발적인 산수벽은 김창협, 김창흡 그리고 이병연, 홍세태, 정선, 이하곤에게 전이돼 수많은 시와 문장, 그림을 창작하게 만들었다. 이른바 ‘白岳詞壇’ 또는 ‘濃淵그룹’의 형성 역시 김상헌 이래 가법을 온전히 계승한 김수증과 김창협, 김창흡의 문예의식에 큰 빚을 지고 있거니와 숙종 말 영조 전기 노·소론을 다시 묶는 ‘탕평정국’의 재규합 분위기를 타고 ‘진경문화’를 낳는 밑거름이 된다.

김수증과 그의 조카 김창협 형제가 기획한 다양한 ‘구곡문화’의 구상과 기록들은 17세기 후반 ‘한국 은둔사’의 매우 독특한 국면을 보여준다. 17세기 말 18세기 초를 전후해서 ‘화양구곡’에서는 정권 차원의 정지화 작업이 진행됐지만, ‘곡운구곡문화’는 농연그룹 사대부들의 사적인 산수문화 공간체험에 머물고 말아 서서히 시간과 더불어 잊혀져갔다. 이제 그로부터 350년이 흘러 지리적 분단과 무관심의 표층을 뚫고 ‘권력과 은둔’이라는 화두가 새롭게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다. 이를 어떻게 해명할 것인가. 그것이 앞으로 우리가 시대정신으로 껴안고 해결해 나가야 할 과제이다.

요컨대,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까지 약 3세대의 정치적 파동은 조선왕조 500년 역사 가운데서 가장 처참하고 스펙터클한 시대였다. 사화와 환국이라는 정치적 소용돌이가 곡운구곡과 화양구곡이라는 수려한 산천을 역사의 무대로 끌어들였다. 마침내 무대 위에서 짙게 분장하고 강한 조명을 받으면서 선 굵은 연기가 한바탕 베풀어졌다. 김상헌과 송시열, 김수증, 윤효, 인조, 효종, 숙종, 김수항, 김창협, 김창흡이 신명난 몸짓으로 무대 위를 달렸다. 처음에는 화악산 음지를 가설무대로 김수증이라는 주연배우가 시공을 넘나들며 이야기를 주도하지만 갈등의 국면에 이르면 아주 특별한 인물 한 사람이 등장하면서 극적 분위기가 고조된다. 주자의 거의 모든 것을 철저히 따르면서도, 한편으로 ‘도학의 이단자’ 소강절의 세계관에 매혹됐던 송시열의 역할이 이채를 띤다. 500년의 시공을 넘어 송대 ‘권력과 은둔’의 함수관계가 조선 땅 17세기에서 보다 역동적인 모습으로 태어난다. 이 점이 ‘곡운운둔문화’ 해석에서 새롭게 제시하고자 하는 포인트다.

다만 김수증, 특히 조카 김창흡같이 무대에 올랐던 배우들 모두가 과연 심산유곡의 신선한 풍경에 어울리는 배역을 맡았는지는 알 수 없다. 때에 따라 은거지가 저들로부터 버림을 받는 비극도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한 버려짐은 오늘도 권력의 주변에서 심심치 않게 벌어지고 있지 않을까.

유준영 전 이화여대 교수·철학
1935년 강원 춘천 출생. 독일 쾰른대 철학박사. 주요 논문으로 「구곡도의 발생과 기능에 대하여」, 「성리학과 조형예술」등이 있다. 전남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화여대 교수 및 문화재전문위원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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