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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추천 결과가 흥미로운 이유 …한국적 ‘탈근대’의 길 찾기위한 고민
인물 추천 결과가 흥미로운 이유 …한국적 ‘탈근대’의 길 찾기위한 고민
  • 박찬승 한양대 사학과
  • 승인 2010.04.12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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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백년 논쟁의 사람들’ 기획, 이렇게 본다

‘근대 백년 논쟁의 사람들’ 기획의 기본 취지는 지난 백 년 동안의 한국사에서 근대 국민국가 만들기에 나선 인물들의 재조명이다. 인물의 선정은 교수들의 추천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교수신문> 측은 근대 국민국가 건설 과정에서 사상 혹은 운동을 통해 기여한 인물, 그러면서도 동시에 ‘근대 이후’를 고민했던 인물들을 추천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이 기준은 어찌 보면 너무 작위적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경술국치 백주년의 시점에서 지난 백년의 한국 지성사를 정리해보면서, 동시에 한국적 ‘탈근대’의 길을 그 안에서 모색해보자는 나름의 고민이 담긴 기획으로 이해해 본다.

인물 추천의 결과는 매우 흥미롭다. 먼저 각 분야별로 인물들을 살펴보고, 뒤에 전체적인 경향성을 짚어보기로 하자. 철학ㆍ사상 분야에서는 신남철, 박종홍, 함석헌이 선정됐다. 주지하듯이 신남철은 한국에 서양철학을 도입한 첫 세대의 학자로서, 식민지 시기에는 마르크스주의자로서 헤겔을 연구했고, 해방 이후에는 좌파 학술운동에 적극 참여했으며, 결국 월북한 인물이다. 박종홍은 그 다음 세대로서 서양철학을 한국에 소개하고 한국사상을 본격적으로 연구했다. 그는 박정희 정권기 국민교육헌장 제정을 주도하는 등 정권과 밀착해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해방 이후 한국 철학계를 대표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추천된 것으로 보인다.

‘탈근대’지향 연구자들의 관심

함석헌은 이번 설문조사에서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인물이다. 함석헌이 이처럼 많은 추천을 받은 것은 그가 민족운동, 종교운동, 민주화운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면서 비폭력주의, 무교회주의, 민주주의, 공동체주의 등을 제창했고, 또 사회진화론, 전체주의, 국가주의를 반대하는 등 사상의 폭과 깊이가 만만치 않았다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는 노장사상, 불교, 기독교사상 등의 폭넓은 기반 위에서 민중(씨알), 평화, 생명을 강조한 사상가였다. 함석헌은 그가 살았던 시대를 초월하는 보다 보편적인 화두들을 던지고 있었고, 근대의 상징이라 할 국가폭력, 내셔널리즘, 물신숭배 등을 비판했기 때문에 앞으로 ‘탈근대’ 지향의 연구자들의 많은 주목을 끌게 될 것으로 보인다.

문학과 역사학에서 선정된 인물은 임화와 신채호다. 임화는 계급문학의 대표자로서 식민지시기 카프와 해방이후 문학가동맹에서 활동했고, 결국 월북한 인물이다. 시인이었던 그는 소설론, 리얼리즘론 등에 기초해 비평가로서도 이름을 날렸지만, 한국근대문학사를 ‘이식문학론’에 입각해 최초로 정리한 이론가였다. 오늘날 한국문학사 연구자들은 임화를 ‘문학에서의 탈식민’의 텍스트로 다시 읽고 있다. 아마도 이러한 경향은 상당 기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1960년대 식민사관 비판, 민족사관 부활의 구호와 함께 조명받기 시작한 신채호는 아직도 역사학자들의 가장 많은 인기를 끌고 있는 인물이다. 민족주의 사학자의 대표로 꼽히는 그가 아직도 인기가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민족주의 사학자였지만 동시에 독립운동가였고 아나키스트였다. 또 역사의 주체로서 민족과 민중을 강조했다. 한국사학계에서 아직도 신채호를 계속 찾고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한국 학계 여전히 민족주의적 지향 강해

경제학과 사회학에서는 김성수, 박현채 그리고 신용하가 추천됐다. 대지주가의 아들이었던 김성수는 일제하에 경성방직을 창립했고, 동아일보와 보성전문학교를 경영했다. 경성방직은 대표적인 조선인 기업이었다. 박현채는 1970년대에 민족경제론을 제창한 경제학자다. 박정희 정권기 외국자본과 수출에 의지한 경제개발정책을 비판하면서 대안으로 국내자본과 내수에 기반을 둔 내포적 공업화를 주장했다. 1997년 IMF사태, 그리고 2009년의 외환위기는 경제학자들로 하여금 다시 민족경제론을 반추하게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신용하는 생존인물로서는 유일하게 선정된, 한국의 대표적인 사회학자이다. 사회사, 사회사상사, 그리고 독립운동사 분야에서 정력적으로 한국근대사를 천착해왔다는 점, 그리고 미국식 사회학이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외롭게 한국사회학의 정립을 위해 분투해왔다는 점 등이 높이 평가된 것으로 보인다.

추천된 인물들을 전체적으로 살피면, 민족주의 성향의 인물들이 상대적으로 많다. 박종홍, 신채호, 신용하, 박현채, 김성수, 함석헌 등이 그러한 인물들이다. 이번 설문에 참여한 이들이 한국 학계를 대표한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이번 설문 결과는 한국 학계의 ‘민족주의적 지향’이 아직도 강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편 신채호, 박현채, 신남철, 임화, 함석헌 등은 자본주의적 근대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을 보여 온 인물들이다. 이들이 선정된 것은 한국 학계의 강한 ‘근대비판적 지향성’을 반영한다고 여겨진다. 즉 이번 설문 결과는 지난 100년간의 사상적 유산 가운데 특히 ‘민족주의적’이면서도 ‘근대비판적’인 사상의 유산을 승계하고자 하는, 다른 말로 하면 ‘탈식민’ ‘근대비판’을 지향하는 학계의 경향성을 보여주고 있다.

박찬승 한양대 사학과

서울대에서 「일제하 실력양성운동론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한국근대정치사상사연구』, 『민족주의의 시대』, 『근대이행기 민중운동의 사회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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