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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아래서 위로, 그리고 옆으로
[문화비평] 아래서 위로, 그리고 옆으로
  • 이영석 광주대·서양사
  • 승인 2010.03.29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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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석 광주대·서양사
이전에 나는 올림픽이나 월드컵 같은 국제경기 중계방송을 자주 시청하지 않았고 보더라도 별로 흥분하는 편이 아니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다. 초등학교 시절 낡은 라디오 앞에서 시골친구들과 도쿄올림픽 경기 중계방송을 들을 때에도 별로 열광하지 않았다. 애국심에 불타 큰 소리로 외치는 아나운서의 웅변조 어투를 유달리 싫어했던 것을 기억한다.

청소년 시절 이후에는 당연히 동원의 정치와 동원된 문화를 혐오했다. 유신시대나 군부독재시대에는 방송의 위압적인 어조에서 풍기는 압박감을 참지 못했다. 그러던 내가 어느 때부턴가 국제경기 이벤트를 별다른 부담감 없이 시청하기 시작했다. 텔레비전 중계방송에서 아나운서의 선동적인 어조가 사라지기 시작한 후에 내 태도도 변하지 않았나 싶다.

이번 벤쿠버 동계올림픽대회 중계방송을 평소와 달리 여러 번 시청했다. 김연아 선수뿐 아니라 다른 선수들 모두가 스스럼없이 인터뷰하는 모습에 놀랐고, 그들이 자신이 선택한 스포츠를 진심으로 즐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어린 선수들은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당당하면서도 자연스러웠다. 이 또한 한류라고 불리는 우리 문화의 한 특성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오늘날 한국문화의 역동성은 비단 스포츠뿐만 아니라 공연과 전시와 영상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분출되고 있다. 전통과 혁신을 함께 녹여 조화를 이루면서도 새로운 전망을 제시한다. 이 신기한 움직임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가. 그 동력은 어디서 나오는가. 나는 이 역동성이 지난 반세기에 걸쳐 우리가 겪은 민주화운동의 성취와 관련된다고 본다. 세계 역사상 이렇게 오랫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열정과 열망과 노력이 모여 제도적 민주화를 이룩한 사례는 보기 드물다.

그 운동은 어느새 우리 사회 곳곳에 스며들어 새로운 전통의 토양이 됐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역동적 에너지는 이런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그것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문화가 아니라, 아래서 위로, 그리고 옆으로 퍼져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새롭게 생성된 문화다. 자발적 참여에 바탕을 둔 새로운 소통의 문화는 서울 월드컵경기나 2년 전 촛불시위에서 거듭 확인한 바 있다.     

요즈음 여권 인사들의 연이은 舌禍가 화제다. 한 두 사람의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고 여러 사람들의 실언이 계속 보도되면서 관심을 끌고 있다. 집권여당을 걱정하는 사람도 많다. 그들은 긴장이 풀어졌기 때문이라거나, 지지율이 높은 데 따른 오만함이 고개를 들었기 때문이라고 변명한다.

나는 고위직 인사들의 실언을 지켜보면서 새삼스럽게 디아스포라의 역사를 떠올린다. 특정시기에 집단으로 해외에 이주한 사람들은, 새로운 환경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그들 자신의 문화를 지켜나가려는 경향을 보여준다. 한국과 중국의 인적 교류가 처음 시작됐을 때, 연변지역을 방문한 사람들은 그곳 조선족의 일상적인 삶에서 일제시대 우리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다고 한다. 요즈음에도 미국 교민사회에서 70년대의 한국사회와 우리의 자화상을 엿볼 수 있다. 식탁의 큰 밥그릇이며 식사 도중에 수시로 많이 먹으라는 집주인의 권유가 그 가난했던 시절의 분위기를 떠오르게 한다.

나는 지난 10여 년간 한국에서 또 다른 의미의 디아스포라 역사가 전개됐다는 것을 새삼 확인한다. 어린이에서 청장년에 이르기까지 그 모두가 평등과 개방과 소통과, 그리고 탈권위나 탈중심의 언어를 소중히 생각하던 시기에, 그 같은 변화를 외면하고 이전의 가치와 제도만을 주술처럼 읊조려온 폐쇄적인 집단이 있었음을 깨닫는다.

그들이 간직한 전시대의 문화는 위에서 아래로 전파되는, 소통과 개방보다 명령과 지시에 더 걸맞은 것이리라. 그러나 문제는 시대의 패러다임이 이미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거의 불가역적인 변화다. 아래서 위로, 그리고 옆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의사소통의 문화야말로 이 시대에 각인된 지울 수 없는 풍경이다. 근래 새롭게 발견한 한국판 디아스포라의 역사를 보면서 나는 씁쓸하게 웃을 수밖에 없다. 아무쪼록 정부는 고위직 인사를 임명할 때 보수적 가치를 지키면서도 적어도 최근 사회변화의 속성을 얼마간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보라 권유하고 싶다.

이영석 광주대·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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