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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례는 특수모델로만 표상돼야 하나
한국사례는 특수모델로만 표상돼야 하나
  • 조희연 성공회대·사회학
  • 승인 2010.03.29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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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론]조석곤·박은홍 교수의 『동원된 근대화』 서평을 읽고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박정희 시대는 여전히 논쟁적 주제이며 현재진행형인 爭鬪의 주제이다. 필자는 최근 그러한 쟁투의 차원이 한단계 엎그레이드돼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이전의 보수 프레임이나 진보 프레임 및 그 각각의 전제들을 신주 모시듯 견지하면서 ‘대치’하는 것이 아니라, 한 단계 높은 ‘프레임 경쟁’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 프레임 경쟁에서 중요한 것은 적대집단의 논의까지를 비판적으로 전유하는 확장적 재구성 노력이다. 이런 각도에서 필자는 『동원된 근대화』에서 보수들이 강조해 마지않는 ‘성공의 동학’ 혹은 ‘효율의 동학’과 진보가 강조해마지 않는 ‘위기의 동학’과 ‘균열의 동학’이 ‘체제의 양면성’으로 어떻게 상호

박정희 체제 성격 규명이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사회과학 일반화의 문제가 논쟁점으로 떠올랐다.

결합돼 있는지를 보이고자 했다. 또한 이른바 박정희 체제의 헤게모니의 구성 과정 속에 동시에 ‘헤게모니 균열’의 요인들이 내재해 있는가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박정희 체제에 대한 대중적 지지와 치열한 저항을 통일적으로 파악해보고자 했다. 물론 진보적 프레임의 확장적 재구성의 문제의식에서 말이다.

필자의 책에 대해 과분하게도 조석곤·박은홍 교수가 소중한 논평을 해주었다. 이 외에도 다양한 매체를 통해 이병천, 황병덕, 강준만 교수 등이 논평을 해주었다. 그 논평의 대부분은 필자 책의 취약성과 향후의 보완지점을 적시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 교수의 논점을 중심으로 몇 가지 반론을 제시해보고자 한다. 조 교수는 “선발자본주의 국가의 역사적 특정 국면에 존재했던 중상주의를 20세기의 개발동원체제와 연결시키는 것은 과도한 일반화”라고 지적했다. 이 점과 관련해 이병천 교수도, 한국의 박정희 체제, 동아시아와 제3세계 국가들의 발전 체제, 독일 비스마르크 체제를 비롯한 서구 자본주의의 후발 발전 체제, 소련의 스탈린 체제, 북한 초기 사회주의 건설체제, 개혁 중국의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 등 상이한 체제들을 개발동원체제로 포착할 경우, 개념의 과잉 확대를 우려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박 교수의 지적처럼 ‘보편과 특수의 반복되는 긴장’으로 옹호해도 좋겠다. 그러나 필자는 앞으로 더 나아가서, 왜 한국의 사례는 언제나 특수모델로만 인식되고 표상돼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다. 필자의 문제의식을 확장한다면, 자본주의적 개발동원체제와 사회주의적 개발동원체제, 후발자본주의 개발동원체제와 후-후발 개발동원체제의 하위유형화를 통해서 조 교수의 비판을 해소해볼 수 있다. 심지어 필자의 능력이 허용한다면, 역으로 독일 중상주의 체제 하에서의 ‘국가동원’ 과정에 대한 연구도 해보고 싶다. 이는 한국의 특수성에서 보다 적극적인 일반개념을 도출하고 이를 서구 현실까지를 재해석하는 차원으로 확장해야 한다는 문제의식 때문이다. 서구=보편, 비서구 및 한국=특수의 인식패러다임이 존재하는 한, 탈식민주의는 불가능하다. 

다음으로, 조 교수는 “박정희의 반공주의를 민족주의에 대립적인 것으로 상정하는 것도 과도한 단순화로 보인다”는 논평을 제시하고 있다. “민족주의적인 수사가 반공주의와 결합할 수 있는 여지는 얼마든지 있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필자의 생각이기도 하며 황병덕 교수의 박정희 근대화담론 분석의 핵심적 논지이기도 하다. 단지 필자는 박정희의 반공주의가 반민족주의적 담론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반공주의가 분명 ‘성공적인 개발주의적 동원’의 조건이기도 했으나, 북한을 적대시하는 민족주의는 ‘반쪽 민족주의’일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통일이라는 민족주의의 또 다른 측면이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의해서 전유되고 그것이 80년대 대중화하는 반미주의 운동의 기초가 됐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조석곤 교수가 지적한 바, 박정희 체제의 물적 토대에 대한 심층적인 분석, 박은홍·이병천 교수가 지적한 바 개발동원체제의 이론적 계보학의 명확화, 그 일부로서 개발동원체제와 개발자본주의, 개발국가(발전국가)의 이론적 차이의 추가적인 분석, 개발동원체제의 제도적 차이에 대한 심도 있는 분석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박 교수는 조 교수가 장점으로 인식한, ‘도덕적 이원론’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두고 ‘식민=악, 탈식민=선’이라는 이원론에 대한 회의로까지 소급될 경우 현재적인 가치지향의 근거도 무너지는 것이 아닌가하는 지적을 하고 있다. 물론 그런 우려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사실 뉴라이트의 식민지근대화론이 이미 그러한 이원론에 대해 도전하고 있기 때문에, 심지어 식민지 시대의 ‘단순한 이원론’까지도 성찰하면서 식민지 시대에 대해서도 ‘확장된 진보프레임’을 향한 노력이 오히려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필요성은 뉴라이트의 박정희 시대 재인식이 단순히 박정희 시대를 둘러싼 각축의 의미를 넘어서서 ‘근현대 歷史像’에 대한 쟁투의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더욱 절실하다고 생각한다. 책의 종장에서도 지적했듯, 식민지근대화론자인 이영훈 교수는 스스로의 역사적 논의지평을 확장해 한편에서는 조선 후기 정체성론을 제시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박정희 시대 수탈 부재론’을 통해서 일종의 ‘신보수적인 근현대 역사상’을 완성해가고 있다. 이에 대응해 어떻게 진보적인 근현대 역사상을 확장적으로 재구성할 것인가 하는 과제가 우리 앞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 과정에서 ‘적대 집단’의 논리나 실증에 대한 비판적 전유까지도 가능하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처럼 필자는 진보적 프레임의 확장적 재구성을 지향하지만, 반대로 이러한 지향은 보수적 연구자들에게도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싶다. 예컨대 이영훈 교수는 ‘한계’ 노동생산성의 증가만큼 임금상승이 있었으므로, 박정희 시대 노동자의 수탈은 없었다는 식의 논리를 전개한다. 1970년대 박정희 시기의 노동 현실을 마치 착취와 희생이 없었던, 자본의 입장에서 ‘줄만큼 준’ 시기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한국 자본주의의 ‘천민성’을 고려할 때 전태일의 분신을 포함하는 노동자의 투쟁이 없었어도 과연 그러한 결과가 가능했다고 말할 수 있는지 묻고 싶다. 그것은 사실 심각한 역사 왜곡이자, ‘휴머니즘이 결여된’ 박정희 시대 옹호론이다. 이러한 비정한 논리로는 보수가 확장될 수 없다. 필자는 나름대로 확장된 진보적 프레임을 구성하고자 노력하면서 동시에 보수의 프레임도 비판적으로 확장돼야 한다는 주문을 던지고 싶다.

조희연 성공회대·사회학

필자는 연세대에서 박사학위를 했다. 정치사회학과 사회운동론에 관한 논문들을 발표했으며,『한국사회의 쟁점과 전망』, 『복합적 갈등 속의 아시아 민주주의』 등 다수의 저역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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