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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절판의 사회학 - 사라진 冊, 사라진 時代
[기획특집] ·절판의 사회학 - 사라진 冊, 사라진 時代
  • 최성일 출판평론가
  • 승인 2002.04.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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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4-22 13:27:49

최성일 / 출판평론가

책도 죽는다. 살아있는 생명체만 죽는 게 아니다. 살아있는 것들을 살아있게 하는 책들도 죽어간다. 그렇다고 마냥 哭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부활의 기획은 여전히 쓸모 있다.
싸늘한 책의 시체들을 우리는 수 없이 만난다. 당장 필요하지 않다는 이유로 구입하지 않았는데 그것이 실수다. 책은 마치 수명이 정해진 목숨을 달고있는 듯 일정한 시간 내에 유통됐다가 그렇게 사라진다. 이유는 다양하다. 책을 만든 곳이 사라지기도 한다. 국가장치에 의해 무덤 속에 갇히기도 한다. 이렇게 죽어간 책들의 시체는 하나의 역사다.
그래서 우리는 사라진 책들을 불러와 사라진 시대가 아니냐 공모하려 한다. 사라진 시대, 죽어가는 시간. 출판평론가 최성일 씨의 목소리로 책과 시대의 죽음을 들어본다.

출판사 폐업

출판사 폐업으로 인한 절판이 있다. 우리나라의 출판사 숫자는 2만개에 육박한다. 하지만 이들 중 대부분은 개점 휴업 상태에 있다. ‘누가 책을 죽이는가’의 옮긴이 서문에 인용된 출판통계에 나타난 구체적 수치는 이렇다. “2000년말 현재, 모두 1만6천59개인 출판사의 90퍼센트에 이르는 1만4천3백33개사가 1년에 신간을 한 권도 펴내지 못하는 무실적 출판사들이다.” 출판사 자체가 절판 상태에 있는 것이다. 여기에다 한 시대를 풍미한 출판사라 하더라도 시대정신과의 긴장의 끈을 늦추면 독자에게서 멀어지게 된다.
그러나 출판사가 문을 닫는다고 반드시 책이 절판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출판사로 옮겨 계속 출간되기도 한다. 1970년대 후반 광민사가 펴낸 책들은 1980년대 동녘을 통해 계속 나왔다. 형과 아우가 출판사 대표를 맡았던 두 출판사는 형제 출판사라고 할 수 있는데, 책은 형뻘 되는 출판사에서 먼저 나왔지만 사람들에게 널리 읽힌 것은 아우뻘 되는 출판사를 통해서였다. 바스콘셀로스의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 쏘스타인 베블렌의 ‘유한계급론’, 폴 스위지와 모리스 돕의 ‘자본주의 이행논쟁’ 등이 그런 책들이다.
1980년대 중반 홍성사가 종교 전문출판사로 탈바꿈하면서 ‘홍성신서’의 절반 정도가 기린원의 ‘기린총서’로 거듭 태어나기도 했다. 앙드레 모로와의 ‘영국사’, ‘미국사’, ‘프랑스사’ 시리즈,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삶이냐’, 라이트 밀즈의 ‘사회학적 상상력’, 레이몽 아롱의 ‘사회사상의 흐름’, 베르나르 앙리 레비의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 아놀드 하우저의 ‘예술과 사회’ 등이 ‘홍성신서’에서 ‘기린총서’로 옷을 갈아입었다.
국내 저작으로는 조동일 교수의 ‘우리 문학과의 만남’과 ‘탈춤의 역사와 원리’가 살아 남았다. 요즘은 ‘기린총서’도 눈에 잘 띄지 않는다. 헌데 ‘홍성신서’ 가운데 지금도 서점에서 구입 가능한 책이 있다. 제이콥 브로노프스키와 브루스 매즐리시가 함께 지은 ‘서양의 지적전통’(학연사 刊)이 그렇다. 훌륭한 책은 세대를 초월해 널리 읽힌다는 점을 입증하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판금도서

판금도서는 강제적으로 절판된 책이다. 판금도서는 크게 이념서적과 퇴폐·음란·폭력성이 짙은 책으로 대별된다. 이런 점은 국회 문화관광위원회를 통과하고 법사위원회 심의와 본회의 상정을 기다리고 있는 ‘출판및인쇄진흥법’ 제19조 간행물의 유해성 심의에 관한 규정에도 잘 나타나 있다. 여기에 단행본·정기간행물·수입서적에 대해 심의할 권한이 있는 간행물윤리위원회의 심의기준은 다음과 같이 명시돼 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전면 부정하거나 체제전복 활동을 고무 또는 선동하여 국가의 안전이나 공공질서를 뚜렷이 해치는 것 △음란한 내용을 노골적으로 묘사하여 사회의 건전한 성도덕을 뚜렷이 해치는 것 △살인·폭력·전쟁·마약 등 반사회적 또는 반인륜적 행위를 과도하게 묘사하거나 조장하여 인간의 존엄성과 건전한 사회 질서를 뚜렷이 해치는 것.”
간행물윤리위의 심의기준 가운데 첫째와 둘째는 시대에 뒤떨어진 측면이 많다. 지난해 11월 인권운동사랑방이 정보공개법에 의해 법무부에서 입수한 ‘판례상 인정된 이적표현물 목록’에 따르면, 당시 현직 장관이었던 한완상 교수의 ‘민중과 지식인’을 비롯해 리영희 교수의 ‘전환시대의 논리’, 조영래 변호사의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 등이 교도소 반입 금지도서로 여전히 묶여 있다. 번역서로는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 에드거 스노의 ‘중국의 붉은 별’, 님 웨일스의 ‘아리랑’ 등이 교도소의 높다란 벽을 넘지 못하는 실정이다.
감옥 바깥이 감옥 안이나 진배없었던 시절을 상기하면, 그나마 나아진 것으로 여길 수도 있으나, 상기한 책들을 감옥에서 못 읽게 하는 법무당국의 방침은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 책에 여전히 이념의 족쇄를 들이대는 법적 관행은 그렇다 쳐도 출판 진흥을 위한 법안에 버젓이 시대착오적인 규정이 있는 것은 유감스럽다.
음란도서에 대한 심의규정 역시 시대착오적이다. 음란한 소설을 썼다는 이유로 현직교수와 소설가를 법정 구속한 것이 지금으로부터 불과 10년 안쪽에 벌어진 일이다. 하지만 ‘즐거운 사라’와 ‘내게 거짓말을 해봐’ 정도의 성묘사는 성인물이라는 전제 아래 허용돼야 한다. ‘내게 거짓말을 해봐’의 경우, 이 소설을 영화화한 ‘거짓말’에 대해 관대한 처분이 내려진 것은 성에 대한 이중잣대가 적용된 본보기다. 굳이 이념이나 음란성에 대한 규제 장치를 만들고 싶다면, 세 번째 규정만으로도 충분하다.
역사상 焚書가 성공한 예는 단 한번도 없다는 사실을 덧붙이고 싶다. 책은 결코 죽지 않는다. 작년 여름 번역 출간된 우루과이 태생의 아르헨티나 만화가 알베르토 브레시아의 ‘체 게바라’(현실문화연구 刊)는 1968년 세상에 첫선을 보인 이래, 각종 만화관련 문헌과 색인에 숱하게 등재된 걸작이다. 하지만 그림의 상태는 세계적 명성을 약간 무색하게 한다. 선의 윤곽이 흐릿하다.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1973년 광기가 극에 달한 아르헨티나 군사독재정권은 이 작품의 원본을 없애버렸다. 심지어 이 만화의 스토리 작가인 엑토르 오에스테르엘드는 그의 딸들과 함께 행방불명되는 비운을 맞았다. 그러나 용케 살아남은 한 권의 판본 덕택에 번각본이 만들어져 우리에게까지 전해질 수 있었다. ‘내게 거짓말을 해봐’를 펴낸 김영사는 1996년 사태가 확산되자 책을 자진수거해 폐기처분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 책의 암거래 시장이 형성됐다. 책값이 정가의 10배를 훨씬 웃도는 복사본이 10만원 선에서 거래된 바 있다.

출판사 폐업

표절 및 저작권 분쟁에 휘말린 책들도 절판되곤 한다. 하지만 양상은 사뭇 다르다. 저작권이 만료돼 출판권이 다른 출판사로 넘어가면 그 이전 출판사는 해당 책을 절판시킨다. 이건 다툼이 일어날 소지가 별로 없다. 저작권 분쟁에 휘말려 책이 절판되는 경우는 주로 번역서다. 또한 분쟁은 국내 출판사들 사이에 빚어진다. 저작권 위반은 친고죄다. 국내 출판사나 에이전트에 저작권이 없는 책은 무단복제를 해도, 실익이나 나중은 어떨지 몰라도, 당장은 법적 책임에서 자유롭다. 외국 출판사가 일일이 자신이 펴낸 책의 도용 여부를 감시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지적 재산권에 눈뜬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국제 사회의 저작권 보호를 목적으로 하는 베른 협약에도 1996년에야 가입했을 정도다. 그 이전까지 우리나라는 저작권의 무풍지대요, 불법복제의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저작권 분쟁으로 인한 절판은 저작권 무시에서 보호로 이행하는 과도기에 많이 나타났다. 1997년 출간된 ‘성적 차이와 페미니즘’(공감 刊)은 나오자마자 3백부가 순식간에 팔리는 호응을 얻었다. 하지만 초판 2천부에서 안 팔린 나머지는 전량 폐기처분해야 했다. 이 책은 일종의 편역서로 이미 출간된 책들과 겹치는 내용이 많았다. 편역서에 대해서는 저작권을 엄밀히 따지지 않는 관행도 이 책의 절판을 계기로 사라졌다. 부르디외의 대표작 중 하나인 ‘구별짓기’(새물결 刊)는 번역판이 나왔지만 시중에서 구할 수가 없다. 출판사가 저작권 계약을 맺지 않고 번역했지만, 이 책에 대한 저작권을 다른 출판사가 갖고 있어서다. 저작권부터 확보해 놓고 보자는 행태는 바람직하지 않다.
우선 저작권을 확보하기 위한 출판사간의 경쟁이 치열하면 저작권료는 올라가게 마련이다. 국내 독서계에 꽤 많은 고정독자를 가진 촘스키의 글을 엮은 ‘인디스펜서블 촘스키’를 확보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다고 한다. 원서가 6백쪽이 넘는 책을 번역하면 1천쪽에 이를 텐데, 저작권 확보 경쟁에 참여한 출판사들이 이런 책을 어떻게 번역하고 만들며 판매할 지에 대한 복안은 있는 건지 궁금하다. 자신의 역량으로는 버거운 책을 부여잡고 있어선 곤란하다. 한편 기존의 번역을 활용하는 방안도 모색할 만하다. 그런 점에서 마샬 맥루한의 ‘미디어는 맛사지다’는 본보기가 될 만하다. 이 책은 1988년 열화당을 통해 우리에게 처음 소개됐다. 저작권 계약을 맺어 ‘맥루한 전집’을 펴내고 있는 커뮤케이션북스는 열화당 판본을 그대로 가져와 ‘미디어는 맛사지다’를 만들었다. 커뮤니케이션북스 판에는 이에 대한 감사의 문구가 적혀 있다.
표절이 들통 나 절판되는 경우는 드물다. 표절에 관대한 사회 풍토에 기인한 현상이기도 하거니와, 출판사로서는 ‘泣斬馬謖’의 결단의 필요하기 때문이다. ‘세계사 시인선’과 ‘책세상문고·우리시대’에는 이가 하나씩 빠져 있다. ‘세계사 시인선’의 ‘지느러미가 아름다운 사람’은 수록된 작품들이 다른 사람의 것으로 밝혀져 목록에서 제외됐고, ‘책세상문고·우리시대’의 ‘나, 아바타 그리고 가상세계’는 표절이 문제돼 목록에서 퇴출됐다.

수요 부족

수요 부족으로 인한 사실상 절판이 가장 많다. 잘 아는 출판사 대표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신간이 꼬박 2천부씩만 팔려도 빚 안 지고 출판을 하겠다.” 2천부는 손익분기점인 셈이다. 이론상으로는 5백부나 1천부만 팔아도 수지를 맞출 수 있다. 예상 판매부수에 따라 책값을 높게 책정하는 방법으로 말이다. 하지만 이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다. 책값이 지나치게 높아질 소지가 다분하지만 가격에 걸맞는 품질을 담보하기는 어렵다. 전반적인 물가상승에 따라 공공 서비스 요금이 인상되지만 서비스는 나아지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초판 2천부를 찍은 책이 사실상 절판 상태에 처할 경우, 팔리지 않은 책이 꽤 남게 된다. 위탁판매제를 시행하는 한국과 일본에서는 반품 문제가 심각하다. 일본의 반품률은 2000년에 39.5퍼센트를 기록했다. 우리나라의 반품률도 이에 못지 않다. 편의상 반품률을 40퍼센트로 가정할 때, 초판 2천부를 인쇄한 사실상 절판된 책의 경우, 출판사로 되돌아오는 숫자는 8백권에 이른다. 팔리지 않고 출판사 창고에 묵혀 있는 책들은 실로 엄청난 규모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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