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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화제] 『오늘의 동양사상』의 ‘동양철학, 그 인식의 현주소를 묻다’ 설문조사 결과
[학술화제] 『오늘의 동양사상』의 ‘동양철학, 그 인식의 현주소를 묻다’ 설문조사 결과
  • 권희철 기자
  • 승인 2002.04.2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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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4-22 14:51:35

지난 해 도올 김용옥의 TV 강의를 두고 시작됐던 동양철학 논쟁은 이후 지면을 옮겨가며 동양담론의 정체성을 묻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동시에 대중들은 동양철학에 대해 높은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논쟁이 거둔 성과에 대해 따져보는 것과는 별개로 이런 현상 자체가 동양철학에 대한 대중들의 기대감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해 볼 수 있다. 근대성의 폐해를 치유할 수 있는 대안적 사유로서 동양철학에 거는 기대와 관심이 그것. 그러나 실제 논쟁에 동양철학을 연구하는 당사자들의 참여가 극히 미미했던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박원재 고려대 강사(철학)는 이 문제의 심각성을 이렇게 표현한다. “우리 사회 동양철학 연구자들은 불행하게도 대화보다는 침묵을 선택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 점은 작년 여름부터 다시 불붙기 시작한 동양철학과 관련된 담론들 속에서 직접적인 이해 당사자라고 할 수 있는 동양철학 연구자들의 발언이 상대적으로 소략하다는 데에서도 잘 드러난다.”

‘오늘의 동양사상’이 제6호 특집으로 동양철학자들의 자기 인식을 묻는 설문조사를 한 것도 이런 문제의식에서 비롯됐다. 홍원식 계명대 교수(철학)는 설문의 의의에 대해 “사실 우리는 그 동안 자기의 생각과 자기의 방식대로 동양철학 연구를 해왔다고 볼 수 있다. 남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연구하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래서는 결코 안 되겠다는 생각에 먼저 우리 스스로에게 자기가 하고 있는 동양철학 연구에 대해 도대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묻기로 했다”고 밝히고 있다. 무엇이 문제인지 논하기에 앞서서 전공자들의 의식에 대한 실증적인 조사가 필요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설문대상은 크게 동양철학 전공자와 인접 학문 연구자로 구분됐다. 또 동양철학 수업을 듣는 대학생들도 조사에 포함됐다. 동양철학이 현대문명의 대안이 될 수 있는가 묻자 전공자와 비전공자를 막론하고 그 대안 가능성을 높이 샀다.<도표1 참조>전반적인 대안이 될 수는 없을지라도 부분적 대안정도는 될 수 있다는 의견이다. 동양철학이 대안이 될 수 있다면 가장 성공 가능성이 높은 세부 담론 영역은 무엇일까. 이에 대해서 전공자들은 공동체주의·윤리도덕론·환경생태론에 높은 점수를 준 반면, 비전공자들은 윤리도덕론에 주목한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몇몇 지식인들과 일부 언론에서 활발히 논의됐던 ‘아시아적 가치’에 대해서는 가장 낮은 평가를 내렸다. ‘아시아적 가치’가 과대포장돼 유포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결과로 읽힌다.

그런데 이처럼 동양철학의 높은 대안 가능성이 현실화되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오늘의 동양사상’이 전공자들의 연구 태도에 대한 문제점을 묻자, 전공자들은 △타 학문과의 대화 부족 △현대적 해석에 대한 게으름 △대중과의 호흡 부족 등을 주요 문제점으로 꼽았다. 비전공자들도 엇비슷한 진단을 내렸으나 원전중심주의에 빠져 있다는 의견도 22.9%에 달했다. “결국 대화의 문제로 귀착된다”는 박원재 박사의 해석처럼 대안 가능성의 현실화 여부는 동양철학자들의 자기 반성에 달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흔히 동양철학계의 아킬레스건으로 지적되곤 했던 ‘문중학’에 대한 질문에 전공자들의 21.2%는 문제될 것 없다고 대답했고, 바람직하지 않지만 불가피하다는 의견도 33.3%에 달했다.<도표2 참조>특히 연령과 직위가 낮아질수록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이 낮게 나타나기도 했다. 이런 결과에 대해 동양철학 연구자들은 한결 같이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젊은 연구자들이라면 의당 도전적 문제의식을 갖고 있으리라는 판단에 전면 배치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화 부족 이전에 선행돼야 할 자기 반성조차 없는 것은 아닌지 묻게 된다.

이와 같은 결과에 대해 어느 강사는 “결과 자체가 우리 학계의 열악함을 반증하는 게 아니냐. 자기 정립에는 반성이 전제돼야 하는데, 시대가 흐르면서 일종의 망각에 빠지고 있는 것 같다”며 젊은 연구자들이 스스로를 속이고 있거나 자명한 현실 문제에 대해 무지한 것이라 해석했다. 또 그는 이런 현상의 원인을 선배 학자들이 후배들에게 반성적 사유를 이어주지 못하고 있는 데서 찾기도 했다. 앞으로 동양철학계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극복해나갈지 주목되는 부분이다.

권희철 기자 khc@kyosu.net

●설문조사결과를 보고 나서
젊은 학자들의 默契?

정세근 / 충북대·철학

왜 우리는 자기의 전공이 옳다고 할까. 그것을 통해 자기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이다. 공자를 전공하면 공자가 옳다 하고, 플라톤을 전공하면 플라톤이 옳다 한다. 한국철학자에 이르면 더욱 그러하다. 과연 그럴 필요가 있을까. 아니다. 철학은 비판을 통한 발전이다. 나는 자기의 전공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입장을 ‘전공주의’라 부르며, 그것의 타파야말로 우리 인문학의 생명력과 직접적으로 관련을 맺는다고 믿는다.
문중학이란 문중의 선양을 위한 학문을 가리킨다. 서양철학자가 한국철학계의 문중학을 비난하기에, 나는 “서양철학자는 문중학자 아니냐”고 되물은 적이 있다. 칸트학회, 헤겔학회 등 자기만의 무대라는 점에서 여전히 문중학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데 한국의 문중학이 더욱 문제되는 것은 돈을 받는다는 점이다. 유명한 철학자가 관건이 아니라, 유명한 문중이 관건이 되는 셈이다.
그럼에도 내가 놀랍게 생각하는 것은 젊은 학자들의 문중학에 대한 지나친 默契 때문이다. 30, 40대 학자들이 50, 60대 학자들보다 훨씬 많게 ‘문중학이 문제되지 않거나 불가피하다’고 대답했기 때문이다. 좋게 보자. 그렇다면 ‘문중의 돈을 받더라도 잘만하면 되지’라는 자신감이 30, 40대 학자들의 생각일 수 있다. 또한 대학원생과 강사 그리고 지방대 교수들이 더욱 지지하는 까닭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의 유일한 탈출구였다는 분석도 가능하다. 나쁘게 보자. ‘문중의 돈을 받아보니 역시 뜻대로 안 되더구나’라는 경험담이 50, 60대 학자들의 생각을 통해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설문조사에서 나도 불가피하다는 편에 손을 들었다. 국학연구비가 절대 부족한 현실에서 가뭄에 단비 내리듯 하는 문중의 지원은 죽어가는 생명체에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적어도 ‘돈을 받지 않는 것’이 ‘받는 것’보다는 좋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문중의 지원은 어쩔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비판의 안목까지 잃어버리면, 우리의 철학을 욕되게 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 나라는 3대 지폐 가운데 둘이 철학자로 장식된 자랑스러운 철학의 본향이다. 세종대왕도 한글창제라는 국어학자라는 점에서 인문학자로 본다면, 대한민국은 인문학의 고장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철학과 인문학을 길거리의 거지로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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