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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대회] 중국에서 서사문학이 뒤늦게 자리잡은 까닭은?
[학술대회] 중국에서 서사문학이 뒤늦게 자리잡은 까닭은?
  • 권진욱 기자
  • 승인 2002.04.1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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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서 허구로

‘역사에서 허구로’

이 말은 역사 아니면 허구 밖에 없던 중국의 서사문학이 근대를 만나면서 소설로 나아갔음을 뜻한다. 역으로 말해 지금까지의 근대 이전의 중국문학에서 문학 장르로서의 근대 소설novel은 유난히 커다란 공백으로 남아 있었다. 빅터 메어에서 루쉰에 이르기까지 서구 소설이론에 길들여진 대다수의 연구자들에게 있어 고대 중국 소설은 ‘소설답지 못한’ 것이었다. 중국인들은 사실성에 대한 강박이 커 역사는 잘 기록할지라도 허구를 그럴싸하게 창작하지는 못했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통념이었다.

지난 달 30일 숙명여자대학교에서 열린 제50회 한국중국소설학회(회장 이등연 전남대 교수) 학술발표회 ‘역사에서 허구로’는 중국문학에서 서사문학이 왜 궤도에 오르지 못했는지를 흥미있게 다룬 자리였다. 이등연 교수는 이번 학술대회를 “루샤오펑 교수가 쓴 동명의 책을 바탕으로 심도있는 논의를 펼치고자 기획했다”고 말한다.

‘담론만 무성할 뿐 서사는 없던’ 중국 문학에서 소설장르의 발생사를 연구한 ‘역사에서 허구로-중국의 서사학’(길 刊)은 서구의 서사(학)의 역사를 살펴본 뒤 이와는 다른 중국문학의 서사구조의 전통을 제시하기 위해 ‘진짜같은 그럴싸함’을 뜻하는 핍진성이라는 개념을 끌어들인 논쟁적인 책이다. 역사만을 의미있게 보던 고대 중국의 전통에서 ‘작은 이야기’라는 뜻의 小說은 근대적인 노벨 혹은 오늘날의 넓은 의미의 픽션이 아니라 시시껄렁한 로망스를 뜻했다. 따라서 로망스에 가까운 근대 소설 이전의 중국 서사문학 장르인 남조의 志怪, 당대의 傳奇, 송원대의 話本을 독특한 서사양식의 하나로 간주하는가, 아니면 겉도는 담론의 채록으로 치부하는가에 따라 ‘동아시아적 말하기 가능성’에 대한 논리적 귀결이 크게 달라지므로 연구자들의 해석도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다.

‘서사학의 가능성’ 시험대 올라

이날 학술대회의 주된 문제의식은 ‘서사의 중심축으로서의 眞과 幻’을 주제로 한 김지선 고려대 강사(중문학)와 ‘이야기와 역사’를 주제로 한 조관희 상명대 교수(중문학)의 발표에서 잘 드러났다. 두 사람은 각자 맡은 발표를 통해 중국의 서사문학이 허구와 환상, 사실과 역사라는 서로 대조적인 위치에서 출발했지만 이 두 갈래의 길이 근대소설이라는 공통적인 맥락에서 만남으로써 중국문학이 얼마나 커다란 진폭으로 펼쳐졌는가를 보여주었던 것.

김지선 박사는 중국의 志怪 장르를 분석함으로써 동아시아에서 서사의 전통이 부재했던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특히 프로이트의 개념을 차용하여 眞을 이성에 의한 억압적인 현실원칙으로, 幻을 욕망을 분출하는 쾌락원칙으로 설명해 주목받았다. 서구담론에서는 현실을 모방하려는 미메시스가 서사의 주종을 이루는 반면, 근대 이전의 동아시아 담론은 환타지와 리얼리티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얽혀 있다고 보는 셈.

조관희 교수는 역사기술 즉, 史記에 집착한 나머지 중국문학이 개연성 있는 허구의 세계인 소설문학을 발전시키지 못했다는 부정적인 통념을, 전통 속에서 창조성을 찾는 중국인의 모순적 의식세계를 통해 반박했다. 조 교수는 “공자의 ‘春秋’에 비하면 ‘史記’는 결코 창작이 아니다”라는 사마천 식의 ‘부정함으로써 주장하기’야말로 역설적으로 원전 연구나 원류 회귀를 지향하는 “중국문학의 復古 혹은 擬古의식”이라고 풀이했다.

‘미디어, 역사, 그리고 가족 로망스’를 발표했던 공임순 서강대 강사(국문학)는 최근 ‘사극 붐’으로 대표되는 미디어의 복고현상을 소재로 삼아 눈길을 끌었다. “미디어의 선별원칙은 선정성과 볼거리이다”라는 부르디외의 주장을 따르고 있는 공 박사는 ‘강한 여성상’에 발맞추고 있는 ‘여인천하’나, 죽음을 신파적인 카타르시스에 기대어 미학화하려는 ‘명성황후’를 이런 ‘미디어 원칙’의 전형적인 사례로 분석했다. 미디어는 민족주의와 가족이라는 고전적인 서사를 통해 동일성과 통합성을 지향한다. 역사가 현재에 의해 재의미화하고 미래까지도 결정짓는 투쟁의 영역이라고 단언한 공임순 박사의 발표는 사극 뒤에 가리워진 현실의 의미를 되새기게 했다.

‘동아시아 담론’ 될 지는 미지수

‘尹德熙의 ‘小說經覽者’에 관하여’를 주제로 한 박재연 선문대 교수(중문학)의 발표는, 서사를 직접 놓고 논쟁한 앞서의 발표에 비한다면 ‘보고대회’같은 분위기로 펼쳐졌다. ‘소설경람자’는 조선중기의 대표적인 문인화가 윤덕희가 문인화를 익히던 시절 읽었던 소설 1백28종에 대한 서평집. 박 교수의 발표는 ‘소설경람자’를 통해 조선 지식인의 중국서사문학에 대한 독해방식을 어렴풋하게나마 가늠할 수 있게 한 자리였다.

이날 학술대회는 비전공자들이 이해하기에는 다소 난해한 편이었지만, 근대 이전의 ‘중국’과 서사로서의 ‘소설’이라는 전통을 살펴봄으로써 ‘동아시아가 스스로의 전통으로 말하기가 과연 가능하겠는가’라는 명제를 점검해 본, 즉 ‘동아시아 담론’의 가능성을 시험한 자리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특히 환타지와 리얼리티를 넘나드는 말하기 방식, 사실을 허구로 재구성하기보다는 기록으로 재현하려 했던 의고정신에 대한 지적은 자신의 전통과 단절되고 재현능력을 상실한 현대 동아시아인들에게 짙게 드리워진 서구적 근대성의 그림자를 보여주려는 시도로 높이 평가될 만하다. 그렇지만 ‘동아시아’라는 ‘보편적 담론’이 어떻게 문학을 통해 자기색깔로 전개될지에 대한 질문은 조동일 서울대 교수(국문학), 정재서 이화여대 교수(중문학)의 작업과의 연장선상에서 미완의 과제로 남았다.

권진욱 기자 atom@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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