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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인문학의 운명
[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인문학의 운명
  • 강신주 서평위원/서울대 철학사상연구소
  • 승인 2010.03.22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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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 서평위원/서울대 철학사상연구소

인문학적 정신을 갖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그것은 일체의 초월적 가치에 대해 비판적인 거리를 유지하면서 인간을, 즉 삶에서 마주치는 타자와 관계하려는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말해 인문학적 정신의 소유자는 타자를 통해서만 행복할 수 있고 타자를 행복하게 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렇기 하기 위해서 우리는 타자의 속내를 그가 나에게 건네주는 표현을 통해서 읽을 수 있는 인문학적 감수성을 갖추고 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휴머니티(humanity)라는 말의 번역어이지만 人文이란 표현은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이 말은 사람, 혹은 타자가 드러내는 문양, 혹은 글이라는 의미이다.

인문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타인의 표현을 통해 그의 속내를 읽어내는 방법을 배운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평소에 많은 문학 작품, 많은 철학 작품, 그리고 많은 예술 작품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어느 작가, 어느 철학자, 그리고 어느 예술가의 고유한 속앓이와 울분을 공유하는 연습을 지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연습은 모두 우리가 삶에서 마주치고, 나아가 앞으로 마주칠 사람들의 속내를 읽기위해서는 불가피한 것이기도 하다. 

인문학을 공부해서 타자의 속내를 읽을 수 있게 된 것으로 충분할까. 그렇지 않다. 인문학은 나와 타자 사이의 행복한 관계를 지향하는 세계를 꿈꾼다. 그래서 타자의 표현을 읽을 수 있는 인문학적 감수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마도 나의 삶과 정서를 타자가 오해하지 않도록 표현할 수 있는 인문학적 표현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타자의 표현을 곡해해 그와 불행한 관계에 빠질 수 있는 것처럼, 나의 속내를 잘못 표현해 타자로 하여금 오해에 빠지도록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타자의 잘못으로 관계가 훼손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로 치부할 수 있지만, 내 자신의 잘못으로 그런 비극이 초래되는 것은 견디기 힘든 일이다.

“나는 내가 존재하지는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 라캉의 17번째 세미나 ‘정신분석의 다른 측면(L'envers de la psychanalyseSeminar)’에 등장하는 유명한 말이다. 이것은 우리가 자신의 삶에 대해 생각하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는 자신의 삶과는 항상 불일치돼 있다는 비극적인 현실을 표현하고 있다. 바로 이 숙명적인 괴리나 간극을 넘어서야만 한다.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자신의 실제 삶을 생각으로 명료하게 떠올리고 나아가 적절한 표현으로 타자에게 전달할 수 있어야만 한다. 이런 소명은 단순히 정신분석학에게 국한된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것은 바로 인문학 전체의 소명이자 운명이기 때문이다.

인문학의 밑바닥에 자신에 대한 사랑과 타자에 대한 사랑이 전제돼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자신의 삶을 긍정하기,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기. 타자의 표현을 읽어내기, 그리고 타자의 삶을 사랑하기! 인문학은 바로 이런 것이다. 그래서 인문학은 일체의 지적인 허영이나 화려한 레토릭으로부터 가장 멀리 있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의 인문학은 화려하고 능수능란한 언변, 혹은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치장하는 데에만 매몰돼 있는 것은 아닌가. 공자도 말하지 않았던가. “巧言令色, 鮮矣仁.” “듣기 좋게 말이나 잘하고 보기 좋은 얼굴빛이나 꾸미는 자들 중에는 인한 자가 드물다”는 뜻이다. 오늘은 자신의 속내를 자신에게나 타자에게 적절히 드러내기 위해서 더듬거리며 적절한 표현을 찾으려는 참된 인문학적 정신이 그리워지는 날이다.

강신주 서평위원/서울대 철학사상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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