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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에 숨은 예술과 과학의 ‘구조적 직관’을 읽다
이미지에 숨은 예술과 과학의 ‘구조적 직관’을 읽다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0.03.22 14: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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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_ 마틴 켐프 지음,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오숙은 옮김, 을유문화사, 2010)

마틴 켐프 옥스퍼드대 미술사학과 교수.
르네상스 예술의 전문가로서 예술과 과학의 학제 간 연구를 이끌고 있는 세계적인 학자 마틴 켐프(Martin Kemp) 옥스퍼드대 교수(미술사학)가 예술과 과학을 대비해서 ‘시각적인 것의 역사’를 조망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전문 번역가 오숙은 씨의 번역으로 출간됐다.

예술과 과학의 교점에서 만들어진 시각적 이미지들의 ‘역사’를 다루는 이 책은 예술가와 과학자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중요한 특징을 ‘구조적 직관’이라고 부르고 수많은 사례를 통해 이를 설명한다. 예술과 과학을 넘나들되, 번역자의 지적대로 에드워드 윌슨 식의 ‘통섭’과는 거리가 꽤 먼, 어떤 틈새를 꼼꼼하게 훑어보는 저자의 이 책은 예술가에게는 과학적 안목이, 과학자에게는 예술적 안목이 내재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컨대 저자의 설명대로, 버크민스터 풀러린(Bukminster Fullerine, 탄소 원자 60개로 구성된 축구공 모양의 분자. 1985년 스몰리, 컬, 크로토가 발견했으며, 버키볼이라고도 한다)을 발견한 팀의 대표적 성원인 해리 크로토 같은 유명 과학자들에게서 이러한 시각적 사고에서 촉발된 ‘구조적 직관’을 엿볼 수 있다. 한 가지 더 예를 든다면, C60의 ‘건축적’ 구조가 뾰족한 끝을 잘라 버린 12면체라는 해법에 영감을 준 것은 무엇보다도, 미국의 몽상적 건축가이자 발명가인 버크민스터 풀러의 지오데식 돔이었는데, 이 새로운 탄소 분자의 이름이 어디에 기원을 두고 있는지 쉽게 눈치챌 수 있다. 바이러스의 다면체적 대칭 모델을 만들던 초기 역사에서 주요 인물들 또한 건축가 풀러에게서 영감을 구하기도 했다. 책의 원제는 Seen Unseen: Art, Science & Intuition from Leonard to the Hubble Telescope(2006)이다.

저자가 밝히고 있듯 이 책은 연대기적·공시적인 예술·과학의 역사 서술은 아니다. “그보다는 미술과 과학이 보이는 자연 세계, 보이지 않는 자연 세계에 대해 만들어 낸 이미지들이 역사적으로 서로 엮이는 일련의 교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첫 번째 교점은 르네상스의 시각 혁명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 시기에는 원근법적 공간 구성과 자연 모방의 기술을 통해 자연주의적 이미지가 융성했는데, 이런 움직임은 15세기, 16세기, 17세기 초반까지 이어진다. 두 번째 교점은 이른바 낭만주의 시기와 관계가 있다. 역시 18세기 낭만주의의 전조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이어지는데, “자연을 묘사하면서 역동적인 상호 관계의 양상에 더욱 관심을 쏟았고 시간과 공간에서 숭고한 영역에 도달하려는 열망에 불탔다.” 세 번째 교점은 1970년대까지의 고전적 모더니즘 시기다. 감추어진 추상적 형태와 힘을 강조했으며, 그것들은 종종 더 미세하게 또는 더 거대하게 나타났다. 마지막 교점이 복수성과 과정의 시기인 지금이다.

예술과 과학의 교점에 주목한 저자가 부각하려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에른스트 곰브리치처럼 한 시대의 정신을 규정하는 근본적인 ‘중대한 관념’을 강조하지 않는다. “내가 탐사하는 근본적인 관념들이 보여주었으면 하는 것은 따로 있다. 아무리 다른 매체를 통해 옮겨질지라도, 이미지 속에 표현된 우리의 시각적 본능 중 많은 것들이 서로 다른 시대에 다시 등장한다는 사실이다”라고 말하면서 그는 “그 관념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과학적·미학적 시각화의 특정 양식이나 양상은 서로 다른 혁신가들의 서로 다른 탁월함을 띠고서 여러 시대에 걸쳐 공유된다는 사실일 것이다”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이 대목에서 그는 플라톤이 말하는 ‘상기’(anamnesis)보다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반복’에 가깝다. 키에르케고르는 예술가가 경험을 재창조한다고 보았다.

르네상스 시대 초기 원근법부터 바늘구멍 사진기, 입자 가속기, 허블 망원경, 3차원 컴퓨터 모델까지 예술가와 과학자들이 고안했던 도구를 다양하게 언급하는 이 책은 예술가로 레오나르도, 뒤러부터 사진 발명가, 현대 조각가까지 소환해내고 있다. 과학자로는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다윈에서 리처드 도킨슨, 스티븐 굴드, 에어빈 슈뢰딩거까지 거론하고 있다. 미술, 건축, 사진술, 천문학, 의학, 수학, 생물학 등 박학다식한 지식이 동원되고 있다. 그렇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역사학자로서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 번역자의 지적처럼 “그는 역사학자로서의 책임감을 가지고, 끊임없이 수시로 윤리 문제와 관련된 암시들을 던진다.” 티코의 영웅적 이미지를 비롯해 과학자들 스스로가 만들어온 초상들, 과학적 숭고의 함정, 레오나르도의 생태주의, 사진이 지닌 양날의 칼인 객관성 문제 등 그는 ‘윤리적 가치’를 은근히 제기한다. 시각 이미지가 홍수인 시대, 이미지를 제작하는 사람이나 이를 수용하는 사람들 모두의 의무에 대해 모종의 질문을 던지고 있는 셈이다.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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