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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한국에서 동시 출간 … ‘잊혀진 전쟁’은 과연 잊혀졌을까
독일·한국에서 동시 출간 … ‘잊혀진 전쟁’은 과연 잊혀졌을까
  • 김승렬 경상대·사학
  • 승인 2010.03.22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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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제연구소·포츠담현대사연구센터 공동기획, 『한국전쟁에 대한 11가지 시선』(역사비평사, 2010)

한국의 역사문제연구소와 독일의 포츠담현대사연구센터는 2004년부터 2007년까지 냉전 시기 분단국의 비교역사 연구를 공동으로 수행했다. 포츠담현대사연구센터는 분단 현대사를 중점적으로 다루기 위해 통일 이후 설립된 명망 있는 연구소다. 이 책은 2005년 포츠담에서 개최된 학술회의를 바탕으로 독일과 한국에서 동시에 출간된 집단연구서다.

크게 3부로 구성된 이 책의 부제 ‘냉전의 중심지 유럽에서 바라본 한국전쟁’은 韓獨 공동작업의 주제를 잘 나타낸다. 소련의 팽창을 경제적·사회적 수단으로 봉쇄하는 정책에서 적극적인 군사적 방어로 미국의 냉전 정책이 전환되는 결정적 시기인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한국전쟁은 냉전 기간 최초의 국지전적 열전으로서 동서 진영을 각각 강하게 결속시킨 촉매역할을 했다. 한국전쟁의 직간접적 당사국들 간에 전개된 진영 결속 과정은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지만, 냉전의 한복판인 유럽의 상황은 생소했다. 이 책은 동서 진영에 속해 있는 프랑스, 서독, 동독, 폴란드, 헝가리가 한국전쟁을 서로 달리 인식하고 대응해 적대관계가 심화됐다는 점을 보여줌으로써 한국전쟁의 촉매역할을 생생하게 입증한다(토마스 린덴베르거, 아르파트 폰 클리모, 얀 베렌즈, 미카엘 렘케).

1950년 6월 28일 서울 중앙청 앞에 나타난 북한군 T-34 탱크들. 과연 냉전 중심지의 유럽인들에게 이 전쟁은 ‘잊혀진 전쟁’이기만 할까.


공산 진영의 반응을 분석한 부분이 새롭다. 공산진영 정부들은 북한과 소련이 주장한 북침설을 맹신하고 반미 정서를 선전함으로써 군비 강화를 위한 심리적 기반을 다져나갔다. 1951년초 스탈린이 동유럽국가 정상들과의 회동에서 구체적인 군비증강 계획을 강요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위기감 때문이었다. 이것은 서로 상승 작용을 하는 위기감의 내적 동학으로 냉전의 극단적 대치를 설명하는 ‘안전보장의 딜레마’(Robert Jervis)를 입증하는 역사이기도 하다. 

이 책은 여기서 한 거름 더 나아간다. 정부의 선전과 국민의 반응 사이의 괴리를 날카롭게 짚어낸다. 정부의 기대와 달리 대다수의 동서독인들은 전쟁의 비극을 목도하면서 재무장보다는 평화주의, 인도주의, 민족공조에 더 가깝게 다가갔다. 폴란드인과 헝가리인들 대다수도 반미 관제 집회에 무관심했으며, 오히려 미국이 공산주의 지배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킬 것이라는 희망을 품기도 했다. 하지만 정부와 국민의 이러한 괴리는 진영 내부를 균열시킬 만큼 강력한 것은 아니어서 진영 결속 강화를 반전시키지 못했다.

독일측 편집자인 베른트 스퇴버의 글, 「변방의 전투?-한반도와 한국전쟁을 둘러싼 강대국 전략」은 한국전쟁의 국제적 측면에 대한 기왕의 연구 성과들을 정리했다. 내용적으로 새로울 것은 없지만, 의문부호가 달린 제목이 암시하는 바가 제법 흥미롭다. 유럽인들의 한국전쟁 연구 패러다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간 전쟁의 원인과 성격을 둘러싸고 많은 논쟁이 있었다. 내전과 국제전 중 일방에 방점을 찍는 이 논쟁은 소련, 중국, 북한의 전쟁결정 과정이 밝혀짐으로써 전쟁의 복합적 성격에 대해 어느 정도 합의할 수 있는 학문적 규명에 도달한 느낌이다. 유럽 학자들이 여기에 더 기여할 것이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유럽인들에게 양차 대전이 직접적이었다면 프랑스의 오랜 식민지였던 베트남의 전쟁은 68 학생운동에 깊은 영향을 미친 식민지 해방 투쟁이었다. 하지만 유럽 국가의 식민지가 아니었던 한국의 전쟁은 단지 소수의 유럽인들만 참여했고 그것이 유럽 사회에 미친 영향의 역사적 파장이 극적이지 않았던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런 연고로 오늘날 유럽인에게 한국전쟁은 ‘잊혀진 전쟁’이었다. 하지만 과연 한국전쟁이 냉전의 중심지 유럽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았는가. 베른트 스퇴버는 독일어판 결론에서 (이 부분은 한국어판에는 생략됐다) 유럽인의 집단기억 속에 ‘잊혀진 전쟁’인 한국전쟁이 실제 유럽의 냉전에 미친 영향을 파헤친 것이 이 책의 장점이라 자평한다. 다시 말하면, 한국전쟁은 유럽에서도 결코 변방의 전투가 아니라는 것이다. 

기억의 문제도 제3부에서 심도 있게 다루어진다. 김동춘과 오유석은 한국인들의 한국전쟁 기억 문화에 대한 그간의 연구 성과를 정리했다. 독일의 어떤 서평자의 눈에는 이 부분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유럽에서는 연구할만한 한국전쟁 기억 문화가 없는 모양이다. 그래서 그런지 독일어판에서는 미국의 한국전쟁 기억 문화에 대한 글이 첨가됐다. ‘잊혀진 전쟁’ 이미지와 현실적 영향력의 괴리가 오히려 유럽의 한국전쟁 기억문화인 셈이다. 독일어판 제3부 제목이 ‘한국 1950-1953: 잊혀진 전쟁?’으로 돼 있는데, 이는 적절치 않다. 왜냐하면, 미국의 한국전쟁 기억문화에는 적합할 수 있지만, 한국의 전쟁 기억은 ‘잊혀진’ 것이 아니라 ‘왜곡’돼 ‘굴절’된 것이기 때문이다. 

김광운의 글은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냉전이라는 용어는 식민지 해방과 근대화라는 제3세계 민족의 이해관계를 은폐하는 기능을 한다. 김광운은 냉전 종식 이후 분단을 극복한 독일과 달리 동아시아의 갈등이 지속되고 있는 이유를 묻는다. 한국전쟁을 냉전의 시각에서만 볼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으며, 제국주의적 강대국 정치와 식민지 해방(약소국의 자주)이라는 입장에서 한국전쟁을 보아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런데 이 글은 독일어판에는 없다. 다소 아쉬운 부분이다.

베르너 아벨스하우저는 ‘코리아 붐’이 영국과 서독 경제에 미친 영향의 차이를 분석했다. 서독이 군비 부담이 적었던 점과 서독 경제구조가 점령의 결과 합리화된 점에서 이 차이를 설명하는 부분은 유럽 현대사를 전공한 평자에게도 새롭다. 한국 헌법의 경제기조가 전쟁을 거치면서 ‘균등경제’에서 ‘시장경제’ 중심으로 바뀐 점을 밝힌 박명림의 연구는 한국 헌법사와 한미 관계 연구에 중요한 기여를 할 것이다. 남북한에 서로 다르게 미친 한국전쟁의 경제적 영향을 분석한 김성보와 새로운 사료에 근거해 동서독의 남북한 개발원조의 역사를 다룬 이유재의 글도 한국 현대사 및 한독 관계사에 많은 기여를 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전쟁이 유럽에 미친 영향은 이 책이 다룬 것보다 더 깊고 넓다. 외교적으로 고립된 독재국가 스페인은 한국전쟁 지원을 통해 미국과 외교적 관계를 맺으려 했지만,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반면, 공산권 유고는 소련과 달리 남침설을 주장함으로써 미국의 지원을 받았다(이러한 사실은 이미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미소 대립의 진원지인 독재국가 그리스와 공산 세력의 영향력이 강했던 이탈리아는 과연 어떠했는가. 영국과 프랑스는 한국전쟁 당시 남아시아에서 식민지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한국전쟁은 이 지역의 민족해방투쟁을 자극했을 뿐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가 민족해방투쟁 진압을 냉전의 논리로 정당화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측면이 보다 소상히 연구된다면, 냉전기 세계사에서 차지하는 한국전쟁의 역사적 위상이 더욱 분명하게 밝혀질 것이다.

김승렬 경상대·사학

필자는 독일 쾰른대에서 유럽현대사를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분단의 두 얼굴: 테마로 읽는 독일과 한반도 비교사』, 『인물로 보는 유럽통합사』 등을 편집하고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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