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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사상의 오빠’
[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사상의 오빠’
  • 이현우 서평위원/한림대 연구교수·러시아문학
  • 승인 2010.03.15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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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우 서평위원/한림대 연구교수·러시아문학

리영희 선생의 팔순을 기념한 책 『리영희 프리즘』(사계절, 2010)을 읽고 지난 시대 ‘사상의 은사’를 다시금 생각해볼 기회를 가졌다. 어떤 은사였던가. 강준만 교수는 예전에 이렇게 적었다. “멀쩡하던 대학생들이 리영희의 책만 읽으면 충격을 받고 이상하게 변해갔다. 자신과 가족을 위해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한 공부에만 몰두하겠다던 ‘청운의 꿈’을 내던지고 진실과 인권과 상식의 가치에 입각해 이 사회와 나라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선생의 ‘한국현대사의 길잡이’ 역할은 주로 70년대 후반, 혹은 80년대 초반의 학생·청년들에게 해당하는 얘기였다. 『전환시대의 논리』(1974)가 해방 이후 한국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의 하나로 꼽히지만, 80년대 후반 학번인 나에겐 이미 ‘지나간’ 책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리영희와 책읽기’를 다룬 천정환 교수에 따르면, 그것은 1980년대 중반 이후 달라진 대학가의 독서문화와 관련된다. 『강철서신』이나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 같은 젊은 세대의 책이 대학가를 주름잡던 시기여서 “리영희 같은 경험 많고 나이 든 스승을 경유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는 진단이다. 여느 80년대 대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세미나 세대’였던 나도 학회나 세미나 자리에서 읽은 책은 『철학에세이』였고 『페레스트로이카』였다. 게다가 ‘교조주의자’들이 많았던 80년대에 리영희는 ‘수정주의자’로 내비치기도 했다는 전언이다.   

 
안수찬 기자가 들려주는 1990년대 후반의 풍경도 다르지 않다. 1997년 겨울 한겨레신문의 수습기자들이 사내 교육으로 리영희 선생의 강의를 들었지만 “모두 잤다. 누구는 허리를 세우고 잤고, 누구는 엎드려 잤다”는 고백이다. 시대가 다르다고, 최소한 달라졌다고 믿은 때문일 것이다. 무엇이 달라진 것인가. 대학생 자유기고가 한윤형이 정확하게 짚어준 대로, 대학 진학률이 달라졌다. 1970~80년대 대학생 비율은 청년층의 30%였고, 바로 그 대학생들이 청년문화와 정치의식을 주도했다. 그것이 말하자면, “어떠한 사상이 대중화되기 위해서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처음의 소수가 필요”하다는 리영희의 ‘소수의 전위부대’론, 곧 ‘인텔리겐치아’론과 대학문화가 접목될 수 있는 토대였다. 

그렇지만 오늘날 대학 진학률이 OECD 국가들 가운데서도 가장 높은 86% 수준이라고 하면 사정은 많이 달라진다. 대학생이 더 이상 운동의 동력도, 사회의 전위도 아니게 된 것이다. 그 결과 리영희와 청년문화의 대립항 자체가 상실됐고, 오늘날의 청년은 각자의 고립된 공간에서 고립된 주체로 살아간다는 것이 한윤형의 진단이다. “자본주의가 노동자를 착취하지 않고도 돈만 굴리면 이윤을 얻을 수 있다고 발악하는 금융자본주의의 시대에, 예비 노동자인 대학생들은 자본이 자신을 착취해 주기를 간절하게 바랄 수밖에 없다. 오늘날의 대학생들이 바라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편입’”이라는 것이 이 시대 젊은이들의 정직한 토로다. 이러한 현실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다시금 ‘사상의 은사’를 반추하게 된다. 

20대 에세이스트 김현진과의 대담에서 리영희 선생은 ‘변혁’은 반드시 온다는 신념을 거듭 피력했다. 현실사회주의가 패배한 것처럼 미국식 자본주의의 종말 또한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국가 사회의 지배세력이 계속해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없는 사람들을 박탈하고 모두에게 공정히 돌아가야 할 기회를 빼앗는다면 투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역사의 변증법이 그의 오랜 확신이다. 그의 이러한 신념은 ‘레닌을 반복하라’고 말하는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의 주장과도 겹친다.     

지젝은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그린비, 2009)에서 혁명적 과정의 두 가지 계기를 ‘극단적인 부정의 제스처’와 ‘새로운 삶의 창안’으로 정리한다. 리영희 선생의 설명대로, 의사와 같은 특권계급을 필수적으로 1년씩 시골로 보내 똥지게를 지게 한다든가 궂은일을 하게 하는 것이 중국의 문화대혁명이었다. 가난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의 삶을 생생하게 알게 한 다음 다시 자신의 일터로 복귀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그렇듯 새로운 경제적 조직과 일상생활의 재조직을 겨냥했지만, 문화대혁명은 새로운 일상의 형식을 창조하는 데는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지젝은 그 실패가 문화대혁명이 과격했기 때문이 아니라 충분히 과격하지 못했기 때문에 빚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마오쩌둥 자신이 인민에게는 반란의 권리가 있다고 독려하고 부추겼지만, 정작 백만 명의 노동자가 국가와 당 자체의 소멸을 요구하면서 직접 코뮌적 사회를 조직하고자 시도하자 군대를 동원해 소요를 진압하고 질서를 회복했다. 그렇다고 이러한 실패가 자본주의적 질서에 대한 전적인 투항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지젝은 베케트의 말을 인용해 “다시 시작하라, 다시 실패하라. 더 잘 실패하라”고 말한다. 리영희 선생이라면 노신을 인용해 “물에 빠진 개는 두들겨 패라”고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의식화의 원흉’이 아닌 ‘사상의 오빠’(김현진)로서 그의 말과 글은 여전히 우리 곁에 숨 쉬고 있다.

이현우 서평위원/한림대 연구교수·러시아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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