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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적 절제와 脫俗의 美에 매료된 완전성의 수집가
유교적 절제와 脫俗의 美에 매료된 완전성의 수집가
  • 홍지석 객원기자·미술평론가
  • 승인 2010.03.08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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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적 컬렉터로서의 호암 이병철

호암에게서 근대적 수집가의 감식안과 미학관을 엿볼 수 있다면 그 영향은 야나기 무네요시로부터 온 것이 분명하다.

올해는 삼성 창업주인 湖巖 이병철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다. 그는 여러 면에서 우리 근현대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는데 문화면에서 보자면 특히 ‘수집가’로서의 면모가 두드러진다. 일제강점기에 시작된 그의 미술품 수집은 1945년 해방 이후 본격화됐고 이렇게 형성된 이른바 호암 컬렉션은 삼성미술관 리움으로 이어졌다. 현재 리움의 컬렉션은 양적인 면에서나 질적인 면에서 국내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이에 대해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다. 그는 어떻게 미술품 수집을 시작하게 됐고 어떤 미술작품을 어떤 기준과 방식으로 수집했는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관리했는가. 그리고 이 모든 활동은 우리 현대 문화사에서 어떤 의미와 의의를 갖는가.

    1986년에 간행된 『湖巖自傳』에 따르면 호암의 미술품 수집은 그의 나이 33세에 시작됐다. 삼성상회를 설립해 양조업을 주사업으로 확장해가던 시기다. 처음에 書로 시작된 수집은 곧 회화, 신라토기, 조선백자와 고려청자, 그리고 불상을 포함한 조각과 공예로 확장됐다. 이렇게 골동품 내지는 미술품 수집에 몰두하게 된 동기를 묻는 질문에 호암 자신은 “나 스스로로 분명하지 않다”고하면서 어쩌면 선친의 영향이 아닐까라고 답한 바 있다. 여기에는 선친이 거처하던 사랑방과 필묵이 담긴 文匣, 묵객과 선친의 시문답 이미지가 겹쳐있다. 또한 그는 祭酒甁을 다른 祭具와 함께 소중히 하며 門中 재산목록의 첫째로 꼽던 우리 전통문화환경이 자신을 자연스럽게 書와 도자의 길로 들어서게 한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러한 개인적 동기 외에 그의 의지와 무관하게 부여된 사회-문화적 계기 역시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예술사가 A.하우저의 말대로 자본주의 시대의 도래, 그리고문화주도 계층으로서 부르주아계급의 부상이 호암과 같은 예술애호가-수집가의 출현을 가능하게 했다. 예술작품이 개인의 능력에 따라 누구나 취득하고 누구나 처분할 수 있는 상품으로 변하게 된 역사적 문맥 또한 중요하다.

 

“아름다운 것에는 집념이 어려 있다”
    이렇게 시작된 수집은 해방 이후에 본격화된다. 1945년에서 1970년대에 이르는 시기에 「청자진사연화문표형주자」, 「청자상감 운학모란국화문매병」, 「진양군 영인 정씨묘 출토 유물 일괄」, 「청화백자 매죽문호」, 김홍도의 「군선도」, 정선의 「금강전도」, 장승업의 「호취도」, 「아미타삼존도」 같은 호암컬렉션의 명품들이 수집됐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미술작품을 대하는 수집가의 감식안과 미학관이 자리 잡게 된다. 예컨대 1976년 <일본경제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그는 ‘玩物喪志’미학관을 피력한 바 있다. ‘물건에 얽매여 뜻을 잃지 말라’는 것이다.

    수집가로서 호암은 야나기 무네요시의 일정한 영향 하에-그는 야나기 무네요시를 慧眼으로 높이 평가한다-유교적 절제와 불교적 탈속의 가치와 美에 매료돼 있었다. 이 수집가는 골동품에서 마음의 ‘기쁨’과 정신의 ‘조화’를 찾는다. 가령 그는 초기에 수집한 「청자상감 운학모란국화문매병」에 대해 이렇게 평한다. “매병은 상감 문양이나 유약이 발라진 정도가 다른 예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밝고 산뜻하며 안정감을 가지고 있다. 자랑하기는 그렇지만 고려청자 중에서도 최고에 속하는 명품이라고 나 스스로 인정할 정도다.”

    1976년의 기고문에서 호암은 “폭넓은 수집보다는 내 기호에 맞는 물건만을 선택한 것이 나의 소장품”이라고 밝힌 바 있지만 그의 컬렉션은 한 개인의 기호나 취향을 넘어서는 광범한 규모를 자랑한다. 호암컬렉션은 한국미술의 거의 전 시대, 전 장르를 망라하고 있다. 실제로 미술사가 이광표의 말대로 호암컬렉션은 국내 개인 컬렉션 가운데 장르가 가장 다양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는 수집가의 가장 비밀스러운 동기를 ‘분산에 맞서 투쟁을 벌이는 것’이라고 주장했던 발터 벤야민을 떠올리게 한다. 벤야민에 따르면 대수집가는 혼란스러운것, 분산된 것, 비합리적인 것을 자신이 만든 일정한 체계 속에 배치시킴으로써 그것을 극복한다.

그러니까 그가 추구하는 것은 일종의 ‘완전성’이다. 그 ‘완전성’의 체계 안에서 그는 비로소 개성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는 『호암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한다. “모으는 것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 대부분이다. 만든 것이 아니면 쓴 것, 그린 것, 깎은 것들이다. 이들 手製品에는 만든 사람, 쓴 사람의 땀이 스며 있다. 보다 아름다운 것, 보다 훌륭한 것을 추구하여 마지않는 집념이 어려 있다. 그리고 꿈이 있고 낭만이 있고 개성이 있고 인생이 있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서 바라보고 만져보고 비교도 해보며 忙中閑을 즐기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수집가 호암의 면모에는 혼란스러운 사회 환경 속에서 합리적 기업 체계를 수립하고 그 체계 속에서 발전을 모색했던 기업인 이병철의 면모가 겹쳐 있다고 할 것이다.

“민족공동의 문화재로 사회에 환원”
    수집가 호암과 관련해 주목을 요하는 또 다른 양상은 미술품 수집의 사회적 책무와 관련된 것이다. 다시 하우저를 인용하면 수집은 예술과 감상자 층을 매개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이것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예술작품의 私有 행위는 대중 일반에게 적대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데 그것은 만인에게 속하는 그 무엇인가를 그가 침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년의 호암은 이 문제를 깊이 고민했던 것 같다. 1971년 국립박물관에서 ‘호암수집 한국미술특별전’이 열렸다. 여기서 그는 당시 국립박물관장이던 김원룡의 표현을 빌면 “世人이 모두 觀賞眼福의 기회있기를 학수고대하던 一大 민간 수집”을 대중 일반에게 공개했다. 모두 203점의 호암 수집품이 공개된 이 전시는 국립박물관에서 열린 최초의 대대적인 개인 컬렉션 전시다. 이 무렵 호암은 박병래 박사가 1974년 평생 수집한 문화재 362점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것에 큰 감명을 받았다. 그는 1975년 자신의 컬렉션이 “개인이 소장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것이며, 민족 공동의 문화재로서 사회에 환원돼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에 따라 1978년 1천167점의 문화재가 삼성미술문화재단에 기증됐고 이를 기반으로 1982년 경기도 용인에 호암미술관이 개관했다. 이 문화재들은 대부분 2004년 서울 삼성미술관 리움으로 옮겨져 전시 중이다.

    호암의 수집 활동이 부정적인 논란이된 적도 있다. 호암 컬렉션 가운데 가야 금관 및 부속 금구, 금동대탑 등의 소장 경위가 문제시 된 것. 도굴된 장물이 개인 간 거래 혹은 매매업자를 통해 호암 컬렉션에 속하게 됐을 수 있다는 지적이다. 가야금관의 경우는 1963년 선의취득으로 인정돼 큰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금동대탑의 경우는 지금 개태사와 소유권을 두고 다투고 있다. 이런 이면에도 불구하고 야지마 긴지의 말처럼 아직 문화재보호법이 확립되지 않고 미술품 수집에 대한 일반적 인식이 확립되지 않았던 시기에 호암이 벌인 수집 활동은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특히 우리 미술의 주요 걸작들이 해외로 유출되는 것을 막았다는 점에서 그렇다. 또한 호암미술관의 설립을 통해 개인 컬렉션을 공적 미술관으로 발전시킨 바람직한 모델을 제시했다는 점도 높이 평가할 부분이다. 그 수혜자는 우리 모두와 호암 자신이다. 이 가운데 호암의 경우를 논하자면 그는 자신의 개인 컬렉션을 미술관으로 옮김으로써 투자한 돈 대신에 불후의 명성을 얻었다. 지금 우리는 호암 컬렉션과 호암 미술관이 배제된 한국미술사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탄생 100주년에 수집가로서 호암의 삶을 회고하는 일은 ‘공허해지기 쉬운 유한한 인생으로부터 어떻게 의미와 가치를 찾을 것인가’라는 우리 자신에게 당면한 물음과 대면하는 일이 된다. 

홍지석 객원기자·미술평론가 kunst75@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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