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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시론 ] 다시 생각하는 전환시대 지식인의 책무
[특집시론 ] 다시 생각하는 전환시대 지식인의 책무
  • 교수신문
  • 승인 2002.04.1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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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4-17 16:52:20
최 협 / 전남대·인류학

암울했던 1970년대 많은 지식인들이 지식인으로서의 역할과 책임을 방기하고 있을 때 리영희 교수가 ‘전환시대의 논리’를 통해 우리자신과 우리시대를 새롭게 통찰할 수 있는 시각을 제시했던 기억이 새롭다. 이 일을 오늘 새삼 다시 떠올리는 이유는 3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또다시 새로운 전환의 시대를 통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는 분명 새로운 지성과 성찰을 요구하는 전환기이다. 정보화, 세계화라는 문명사적 변화의 물결, 9·11 테러가 몰고 온 세계질서의 발빠른 재편, 불투명한 남북관계, 21세기형 정권을 선택해야하는 정치일정 등등은 오늘을 일종의 전환기로 인식하도록 만드는 몇 개의 요소들이다. 이러한 전환시대에 지식인의 자세와 역할은 어떤 것인가.

2002년 한국 지식인의 자화상

흥미롭게도 작년 우리사회는 ‘지식인의 위기’라는 주장을 놓고 열띤 논쟁을 벌였다. 소위 언론권력의 세무조사 때문에 촉발된 지식인들 사이의 논쟁과 대립을 바람직하지 않은 편가르기와 줄서기로 치부하면서 이름 붙여진 ‘위기’는 허구지만, 그 과정에서 보수와 진보세력의 대립양상이 드러난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지난 수십 년 동안 한국사회에는 민주화투쟁에 참여하거나 좌파적 사회변혁을 추구하는 진보적 지식인 집단이 성장하면서 현실에 안주하거나 점진적 개혁을 주장하는 보수적 지식인 집단과의 차별성이 드러나게 됐다. 이 두 집단은 서로 각기 나름대로의 사회적 역할을 수행했을 것이고 그에 따른 평가 역시 다양한 견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점은 한국의 지식인들을 보는 외부의 시각이 그리 곱지만은 않다는 사실이다. 혹자는 이 나라의 보수 지식인들은 부지런히 극우와의 경계를 넘나들며 시간을 보내고, 진보 지식인들은 가상현실 속의 혁명사에 침잠할 뿐이라고 싸잡아 비판하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현재의 한국의 지식인들은 전망을 상실하고 지식 상업주의에 물들어 있다는 점에서 전환시대의 올바른 선택을 위한 논리를 만들어내는 사회적 책임을 다 하기에는 무기력하다고 진단하기도 한다.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에 관한 논의가 활발한 프랑스에서 최근 드브레가 펴낸 ‘지식인의 종말’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제공한다.

그는 프랑스 지식인을 1900년대 ‘최초의 지식인’과 2000년대 ‘최후의 지식인’으로 나눈다. ‘최초의 지식인’들은 그 유명한 ‘드레퓌스 사건’에 관여했던 지식인들의 사례에서 볼 수 있었던 바와 같이 개인의 이익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진실을 옹호하기 위해 지식인의 본분에 충실한 반면, ‘최후의 지식인’들은 전혀 그 반대이다. 이들은 사회적 관심을 끌만한 문제가 발생하면 즉시 장기적인 역사의식이나 심층적인 전문지식도 갖추지 못한 채 방송이나 신문지상에 얼굴을 내밀고 매끄러운 수사학으로 ‘여론’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최후의 지식인’들은 집단자폐증에 빠져있고 현실을 호도하고 즉흥적이며 도덕적 나르시시즘에 흠뻑 젖어 지식인의 참된 임무를 망각한 집단이다.

지식인의 역사가 일천한 한국에서 ‘최후의 지식인’을 말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아 보이지만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보수언론이 여론을 주도하는 한국의 현실을 떠올리면 드브레의 지식인 비판은 불현듯 우리의 현실에 다가와 겹쳐진다. 다산 정약용은 인간의 삶에는 ‘옳고 그름’과 ‘이로움과 해로움’이라는 두 가지 큰 기준이 있다고 했다. 어찌 보면 오늘의 한국에는 ‘옳고 그름’을 헤아려 행동하는 지식인보다는 자신에게 돌아올 ‘이로움과 해로움’에 대한 계산에 따라 처신하는 지식인들이 더 많은 것이 아닌지 걱정이 앞선다.

지식인의 유형을 나누어 옥석을 가리는 작업보다 더 중요한 일은 지식인의 역할과 지식인의 조건을 되물어보는 것이다.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이 과연 무엇이어야 하는가는 여러 가지 다른 견해가 있다. 사르트르는 지식인을 인간의 해방, 인간의 보편화, 인간의 인간화와 같은 궁극적인 목표를 추구하는 존재로 보았다. 다시 말해 사르트르가 제시한 지식인이란 보편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수호자였다.

자유로운 비판정신의 소유자

그러나 지식이 점점 더 전문화되고, 사회적 다원성과 복합성이 증대해 가는 과정에 주목하여 지식인의 역할은 이제 전문성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하지만 지식인의 역할을 보편적 가치와 기능적 가치의 추구로 구분하는 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지식인 개개인의 능력이나 위치에 따라 서로 다른 사회적 기여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핵심적 문제는 지식인의 사회적 기여가 어느 특정 집단, 특히 중심집단의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한 점에서 지식인은 지배계급의 헤게모니를 거부하고 창조적이고 자유로운 비판정신을 유지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하이너 뮐러는 “작가가 권력과 결탁하면 더 이상 지식인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참으로 맞는 말이다.

지식인은 모름지기 현실 정치권력뿐만 아니라 언론 따위의 문화적 권력을 포함한 모든 권력들과 거리를 두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오염되지 않은 맑은 정신으로 스스로는 쉽게 모습을 드러내놓지 않는 현실의 정확한 실체를 파악해 국민에게 알리고, 이를 바탕으로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을 제대로 해내야 한다.

지식인의 우선되는 역할이 몸담고있는 현실의 정확한 실체를 파악하고, 나아가 사회가 지향해야 할 바람직한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라면 한국의 지식인은 철저하게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현실분석을 통해 현실적 타당성을 지닌 지식을 창출해내야 한다. 불행하게도 한국의 지식인들은 이 부분에서 아직도 많은 취약점을 드러내고 있다.

추방당한 존재, 능동적 대안 제시해야

즉 우리사회에는 사변적 이론가는 많아도 일차적 자료를 생산해내는 지식인은 적고, 일반론과 총론에 머물러 각론이 없으며, 외국의 이론에는 밝지만 토착학문의 정립이 여전히 걸음마단계에 머물러있는 것이 그 보기이다. 그래서 IMF위기를 정확히 예견하고 대책을 준비하는 데 한국의 학계는 무능했고, 부시의 ‘악의 축’ 발언으로 분단극복과정에 차질이 생겨도 한국의 지식인들은 능동적 대안의 제시 없이 무기력하기만 하다. 그리고 언론에서는 우리사회의 수준을 반영이라도 하듯 정제되지 않은 신자유주의의 메시지가 넘쳐나고, 기껏해야 ‘친미’와 ‘반미’ 논쟁 따위가 지면을 채우고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자신과 우리시대를 새롭게 통찰할 수 있는 주체적 시각의 제시는 여전히 유효한 시대적 요구인 셈이다.
현재 우리가 처한 포스트상황은 근대와는 달리 탈근대, 탈식민, 탈구조의 상황으로 특징 지워진다. 그렇다면 이제는 기존의 지배질서를 지탱하고 있는 지배적 지식에 대응하는 견제지식을 창출해내는 것이 오늘을 사는 한국지식인의 의무가 아닐까. 이는 한국의 지식인들이 외국학문의 수입과 적용에만 급급해 온 관행을 지양하고 이제는 지배질서의 본질을 우리의 관점과 필요에서 분석하고 해석하는 작업을 해냄으로써 한국사회 변혁의 과제를 주체적으로 이끌어가야 된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제기되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한국사회의 모순과 문제의 뿌리가 과연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우리사회의 구조적 모순은 근본적으로 한국의 근현대사가 식민지와 분단의 시대였다는 데 기인한다. 이는 분단체제와 식민주의의 극복이 사회변혁의 기본 틀이 돼야함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사회의 역사·구조적 특성을 명료하게 분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그러한 구조에서 연유한 모순과 문제점의 해결을 모색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중요하고 시급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작금 한국사회에서 쟁점이 되고 있는 문제들, 예컨대 남북문제, 일제청산문제, 미국문제, 사회통합이나 민주주의의 완성문제 등등의 해결책도 이러한 틀 속에서 조망하는 것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또한 바람직할 것이라 믿는다.

다시 열린사회를 향하여

만일 오늘의 현실이 바람직하고 완전한 것이라면 그만큼 한국 지식인의 임무나 역할은 단순할 것이다. 반대로 우리의 현실이 불확실성과 모순, 그리고 새로운 가능성으로 충만하다면 올바른 방향과 비전을 제시해야 하는 지식인들의 책임과 역할은 중요성이 그만큼 더해질 것이다.

그러한 책임과 역할을 다하기 위하여 우리자신의 논리가 필요한데 특히 오늘날과 같은 전환시대에 지식인의 역할을 말하려면 먼저 전환시대의 논리를 찾아야 한다. 미셸 푸코가 ‘감시사회’에서, 그리고 울리히 벡이 ‘위험사회’에서 시대의 논리를 위치지우고 전개했듯이, 한국의 지식인은 ‘분단의 극복’과 ‘탈식민지성’에서 우리시대의 논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분단과 식민성의 극복은 지난 반세기동안 우리 앞에 늘 놓여져 있어왔던 과제였음을 모르는 바 아니다. 아직까지 풀리지 않은 이 어려운 과제는 그래서 그만큼 더 중요한 문제로 남아있는지 모른다. 그것이 그만큼 중요하고 본질적인만큼 한국의 지성들이 모두 관심을 갖고있는 문제인 국가의 억압, 시장의 횡포, 언론의 왜곡 등도 분단과 식민지성이 극복될 때 근원적으로 해결의 실마리가 풀릴 것이다. 그리고 전환의 시대가 지나고 나면 결국 이 모두가 열린사회를 향한 노력이었음을 알게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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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력:1947년 광주生. 서울대 고고인류학과 졸업. 미국 켄터키대 인류학 박사. 전남대 사회학과 교수.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회 사회문화분과 위원. 전남대 박물관장·사회과학연구소장. 한국문화인류학회장. 현재 전남대 인류학과 교수. 저서로 부시맨과 레비스트로스(1996), 인류학과 지역연구(1997), 공동체의 현실과 전망(2001) 外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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