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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적 형이상학의 비밀
과거적 형이상학의 비밀
  • 교수신문
  • 승인 2010.03.02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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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가 분석한 ‘우리 마누라’의 언어적 가능성

‘아내’를 지칭하는 많은 말 중 ‘마누라’만큼 익숙한 것도 없다. “우리 마누라야”란 말에는 아내를 조금 낮춰 부르는 듯해도 친근하고 소탈한 서민의 말맛이 있다. 그런데 ‘우리 마누라’는 분명 문법적인 오류가 있다. 결혼제도가 일부일처제를 택하고 있는 한 ‘마누라’는 나 외에 누군가와 공유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내 마누라’가 정확한 표현이다. 그럼에도 ‘우리 마누라’가 쓰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대현 전 이화여대 교수(철학·사진)는 최근 <한국분석철학회>(제20호, 2009, 12)에 실린 논문에서 그 이유를 추적한다. 다음은 「‘우리 마누라’의 문법」의 ‘맺는 말’을 소개한다.

‘우리 마누라’와 ‘서편제 저술자’간의 세미한 비대칭성을 볼 수 있다. 화자가 두 표현을 사용할 때 ‘서편제 저술자’사용에는 작동하지 않는 함축이나 어의가 ‘우리 마누라’에는 들어 있는 것이다. 이 어의는 ‘우리 마누라’의 ‘우리’나 ‘마누라’에 각기 분리적으로 개입되어 있기 보다는 두 언어 단위가 합성되었을 때 드러나는 어의이다. ‘우리 마누라’에 고유한 이 어의는 무엇일까. 이 어의를 추측하기 위해 하나의 형이상학적 그림을 그려보자.

이를 위해 먼저 희랍 전통의 진리 단어의 형이상학적 그림을 보자. 희랍어로 진리는 ‘aleteia’이고 이 단어의 어원은 비은폐성이다. 영어의 ‘disclosure’에 해당할 것이다. 희랍적 비은폐성이 어떻게 진리인가. 이 단어는 고대 희랍인들의 세계 이해에 대한 형이상학을 드러낸다. 알레테이아의 형이상학은 고대 희랍인들이 세계를 현상계와 실재계로 나누고 진리는 실재계에 존재하며 현상계는 그 진리의 그림자일 뿐이라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플라톤도 정의, 용기, 사랑 같은 개념의 실재적 진리도 인간 경험에서 나타나는 그들의 현상을 벗겨 낼 때 도달되는 것이라고 믿었다. 이와 같이 고대 희랍인에게 진리란 그 그림자를 벗겨내면 드러난다고 믿었던 그 실재의 진리였던 것이다.

 ‘우리 마누라’의 형이상학은 어떻게 그릴 수 있을 것인가. 여러 가지 방식이 가능하지만 그 중의 하나는 다음일 것이다. 한국어를 만들어 낸 한국인 조상들은 대가족을 이루고 살면서 이 삶의 안정성을 중시하고 두레와 같은 공동체주의를 선호했다. 세계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세계이고 사람은 대가족을 통해 낳고 길러지고 완성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조상들은 이러한 세계이외의 다른 가능한 세계를 고려하지 않았다. 이러한 세계관으로부터 유학의 孝心은 더 잘 파악될 수 있었다. 불교의 無心은 개인의 자리가 얼마나 허약한 것인가를 보게 되면서 더욱 강화됐을 것이다. 이러한 세계관에서 ‘나’라는 단어에 대한 마땅한 자리부여가 없었다면 ‘내 마누라’의 자리는 더욱 빈약해졌을 것이고 ‘우리 마누라’는 상대적으로 강한 자리를 부여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 마누라’의 이런 형이상학이 한국 사회를 지배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오히려 소가족제도가 사회 제도적으로 불가피하게 됐다. 개인주의가 허용될 뿐 아니라 시대가 ‘개성’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가족의 부부중심주의에서는 이제 ‘내 마누라’라는 표현이 자연스럽게 됐다. 그런데도 현대 한국인은 아직까지 한국의 일상 언어에 배어있는 ‘우리 마누라’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우리 마누라’의 과거적 형이상학을 인정하면서도 그 현재적 화용학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과거 한국사회의 개인은 한국어의 공동적 삶의 공간에만 참여할 수 있었지만 현대 한국사회의 개인은 이제 구성된 한국어의 개인적 삶의 공간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현대 희랍인이 현상계와 실재계의 이분법적 세계관을 갖지 않으면서도 아직 진리의 희랍어 단어를 사용하는 것처럼, 현대 한국인은 개성시대의 자유를 선호하면서도 공동체주의의 친밀성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우리 마누라’를 사용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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