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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 사랑했는데 잘하지 못해 힘들다”
“물리학 사랑했는데 잘하지 못해 힘들다”
  • 최성욱 기자
  • 승인 2010.03.02 11: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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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교로 돌아온 ‘스타교수’의 비극

 

1956년 트랜지스터 개발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50세의 중견학자 존 바딘 일리노이대 교수는 이듬해 20대 후반의 두 물리학자(리언 쿠퍼, 존 로버트 슈리퍼)와 공동연구로 초전도체의 원리를 찾아냈다. 초전도체 발견 45년 만의 일이었다. 이들 세 학자의 이름 앞 글자를 딴 ‘BCS 이론’(초전도 표준이론)으로 바딘 교수는 1972년 다시 한 번 노벨 물리학상의 영예를 안았다.

하지만 금속처럼 유연하면서도 높은 온도에서 작동하는 초전도체를 찾기 위한 연구에 또다시 반세기가 걸렸다. 그런데 2001년 1월, ‘BCS 이론’의 한계를 뛰어넘는 연구결과가 발표됐다. 포스텍 초전도연구팀이 개발한 ‘MgB2(마그네슘 다이보라이드)박막’이다. MgB2박막은 무선통신 기지국이나 위성 간 장거리 통신 구축망의 핵심 부품 등 우주개발사업에도 중추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당시 포스텍 초전도연구단 단장이 故 이성익 서강대 교수(59세, 물리학과, 사진)다. 초전도체 분야에서 세계적인 업적을 인정받아 일약 ‘스타덤’에 오른 이 교수는 2002년 이달의 과학기술자상, 2003년 한국물리학회 학술상, 2004년 한국초전도저온공학회 학술상을 비롯, 2006년에는 제10회 한국과학상을 수상했다.

세계적인 연구성과로 뉴스를 몰고 다니던 중견의 물리학자가 20년을 몸담았던 대학을 떠나 모교로 돌아왔다. 2000년대 중반, 대학가에 유행처럼 번지던 ‘스타교수 영입 경쟁’에서 서강대가 이 교수에게 손을 내밀었다. 서강대는 연구교수 배정, 정년연장, 수업시수 단축 등을 제시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료교수들에 따르면 당시 이 교수 이직 시 국내 교수로서는 해외 석학에 준하는 파격적인 조건들이 오갔다.

2008년 3월, 이 교수는 서강대 물리학과에 부임했다. 그리고 2년 후, 이 교수는 아파트 화단에서 숨진 채로 발견됐다. 호주머니에는 “물리학을 너무나 사랑했는데 잘하지 못해 힘들다. 큰 논문을 발표해야 하는데 가족과 학생들에게 미안하다”는 유서가 발견됐다. 경찰은 이 교수가 지난달 24일 오후 3시 30분 경, 자신의 집(12층)에서 투신자살한 것으로 추정하고 정확한 사인을 조사 중이다.

‘세계적 연구’ 위한 동력 뒷받침됐다면

이 교수가 서강대에 부임하기 2주 전인 2008년 2월 18일, 일본 도쿄공업대학 프론티어 연구센터 호소노 히데오 교수 연구진은 ‘철을 포함한 고온 초전도체’ 재료를 발견했다고 공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에서도 비슷한 주제로 새 소식이 날아들었다. 중국과학원 연구진이 ‘신형 철 함유 초전도 와이어 재료’ 연구 개발에 성공했다. 이 교수의 이직 시기에 초전도체 연구의 패러다임이 급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교수의 학회 동료인 최한용 성균관대 교수(물리학과)는 “이직을 결정하자 이 교수가 개발한 MgB2 박막을 한 단계 더 뛰어넘는 연구성과물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한 번 더 치고 나가야 하는 상황이었는데…”라며 안타까워했다. 덧붙여 “연구환경이 바뀌면 누구나 적응기간이 필요하다. 당시 이 교수는 더 조바심이 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기초과학연구에서 연구원의 역할은 연구결과를 산출해 내는 데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다. 이 교수와 같은 기초과학분야의 연구환경에서는 대학원생을 비롯한 연구진들을 교육시킴과 동시에 연구성과물이 나와야한다. 박광서 서강대 학과장(물리학과)은 “대학을 옮긴 후 이 교수가 대학원 연구진 구성과 운영 등에서 어려움을 토로했다”고 기억한다. 연구재단 통계자료를 살펴보면 이 교수는 서강대로 부임한 후 2년 간 총 36편의 논문을 발표했는데 대부분이 해외 연구진들과 공동연구를 수행한 결과다.

박 학과장은 그러나 이를 비단 이 교수 개인 연구실 문제로 국한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2000년대 중반, 의치학전문대학원 체제가 들어서면서 기초과학분야 대학원생 모집이 수년째 고사 직전의 위기를 겪고 있다. 연구진 충원이 힘들다보니 연구가 제대로 진행될 리 없지 않나.” 기초과학분야 교수들은 세계적인 연구를 수행하는 데 연구원 4~5명, 대학원생 10여명 정도의 연구진 규모가 뒷받침돼야 한다고 말한다. 이 교수의 연구실에는 연구원 2명, 대학원생 연구원 5명이 있었다.

이 교수는 서강대에 부임하던 때부터 도약연구지원사업(한국과학재단) 초전도연구단에서 연구책임을 맡아 다년과제를 수행해 왔다. 오는 2011년 2월, 사업을 마무리하기까지 정확히 1년을 남겨두고 이 교수는 투신했다. 세계적으로 연구성과를 입증받아 온 중견교수가 자기 학문에 대한 애착, 가족과 동료교수들을 뒤로 하고 삶을 마감했다.

최성욱 기자 cheetah@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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