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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민족주의’로 한국의 근대를 투시할 수 없다고?
‘탈민족주의’로 한국의 근대를 투시할 수 없다고?
  • 최성욱 기자
  • 승인 2010.02.22 15: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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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성의 역설: 한국학과 일본학의 경계를 넘어』헨리 임·곽준혁 편저 | 후마니타스 | 2009 | 352쪽

 

『근대성의 역설: 한국학과 일본학의 경계를 넘어』헨리 임·곽준혁 편저 | 후마니타스 | 2009 | 352쪽

근대성에 관한 성찰적 접근은 이즈음 우리 학계의 브랜드가 되다시피 했다. 철학, 문학연구뿐만 아니라 사회과학에서도 이러한 성찰적 움직임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들은 이러한 근대성의 매혹을 좀더 발본적으로 사유하려는 욕망을 앞세웠다. 이들의 시선은 식민지 공간을 활보하면서 식민지로부터, 식민지 이후의 굴절된 역사 지층을 더듬고 있다. 이들이 근대를 투시하는 수단은 탈민족주의다.

 『근대성의 역설: 한국학과 일본학의 경계를 넘어』(헨리 임, 곽준혁 편저, 후마니타스, 2009)는 지난 2007년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국제학술회의 ‘인문학의 새로운 흐름: 한국학과 일본학의 국가 간·학제 간 경계를 넘어’에서 발표한 여덟 가지 논문을 ‘근대성 뒤집어 보기’라는 테마로 묶어낸 책이다. 3년이라는 시차가 무색하게도 그 고민의 무게만큼은 여전히 공유할 만하다.

이 책은 1930년대 전후로 일제가 직면했던 근대성을 당대의 문학, 통치 체계, 제국주의적 측면에서 천천히 훑어 내린다. ‘근대성의 역설’이란 말 그대로 근대화의 산물(산업화, 도시화의 여러 기저물들)이 제국주의의 폭정 속에서 잉태됐다는 점에서 역설적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이 책이 털어놓은 근대의 기억을 따라 가다 보면 근대성이 담고 있는 역설적인 측면보다는 차라리 ‘역설’(뒤집어 보기)에 무게를 두는 느낌이다.

“자이니치들은 고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일본인이 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으며, 그렇다고 또 다른 그 무엇이 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민족주의적 역사 기술의 한계를 드러낼 첫 주자는 1960년대 ‘자이니치’(2차 세계대전 후 일본에 남은 조선인과 그 다음 세대들), 그리고 그들의 기억이다. 당시 자이니치들이 정조준한 것은 戰後 일본사회의 배타적 인종주의만이 아니었다. 존 리 캘리포니아대 교수(사회학)는 이를 “혼성적 정체성(조선인, 한국인, 일본인의 경계에서 존재하는 정체성)에 대한 상상을 불가능하게 만든 민족주의적 사고방식 자체에 대한 거부”라고 설명한다.

논의는 식민지 조선 지식인들이 자각한 근대성으로도 옮아간다. 1938년 일본 신쿄우 극단의 ‘춘향전’ 일본어 공연으로 촉발된 ‘번역 논란’(2장)은 대표적이다. 서석배 캘리포니아대 교수(동양어문학)는 “1930년대 이태준과 같은 지식인들이 보여준 문화 민족주의는 피식민지 지식인들의 지적 한계를 드러낸다”고 평가한다.

“조선 지식인들의 문화 민족주의는 자족적 고유문화에는 집착하지만 식민자의 타국 침략에는 정치적 목소리를 내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 이정도 지적은 국내 학계에 이미 오래전부터 제출된 시각에 지나지 않다. 문화민족주의에 대한 국학 분야에서의 성과가 있기 때문이다.

막노동 시장(주로 공공사업 인력시장)에서 비숙련 노동자로 고용돼 숙련-비숙련의 민족적 구분지 역할을 감당해야 했던 1930년대 재일조선인들의 삶(5장)도 ‘식민자-피식민자’라는 이분법이 아닌 ‘뒤얽힌 관계’를 조명한다. 이 외에도 2차 세계대전 동안 미국과 일본에서 일어난 재미일본인과 재일조선인의 민족 차별을 정치적 선택에 따라 ‘죽일 권리와 살릴 권리’(4장)로 대응시킨 다카시 후지타니 캘리포니아대 교수(역사학)의 비교역사기술이나 준 우치다 스탠포드대 교수(역사학)의 ‘내선일체 정책에 대한 재조선일본인의 협력’(7장) 등에서 그려낸 ‘포용적 인종주의’는 ‘탈민족’ 시선에서 보면 다분히 역설적이다.

일본 내 조선인들은 막노동 시장에서 ‘핀하네’(머리가 잘려졌다는 뜻으로 막노동자들의 임금에서 선취금을 떼어감)라는 중간착취의 임금체제에 시달렸다. 반세기가 넘은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핀하네는 ‘신식민지의 타자들’(외국인 노동자)에게 고스란히 재현되고 있다. 필자들은 어쩌면 근대를 에둘러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역설을 말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최성욱 기자 cheetah@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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