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박헌영 평전』과 어떤 부재
[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박헌영 평전』과 어떤 부재
  • 구갑우 서평위원/북한대학원대학·북한학과
  • 승인 2010.02.22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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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트로이카』, 『이관술 1902-1950』, 『이현상 평전』 등을 통해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을 다시 불러오는 작업을 하고 있는 노동운동가 출신 안재성의 또 다른 작품이 『박헌영 평전』(2009년 8월)이다. 『평전』은, 조선공산당의 지도자 박헌영이 ‘미제의 간첩’이 아니었다고 말하고 있다. “박헌영 ‘미국의 스파이’ 꼬리표를 떼다”, “남과 북에 버림받은 공산주의자 박헌영” 등의 서평이 실렸고, 이 책은 한국출판문화상 저술부문 후보작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1986년 봄 이른바 「강철서신」으로 ‘미제의 스파이 박헌영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란 비합법 출판물이 등장했다. 박헌영이 미제 간첩이면 김일성이 공산주의운동에서 정통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논리를 담은 강철서신은, 한국의 사회운동세력에게 강한 파급력을 발휘했다. 박헌영 간첩론은, 북한을 이상사회로 생각하는 주체사상파 사회운동세력의 구성을 가능하게 했던 담론이었다. 『평전』의 효과는 지금-여기서 강철서신과 달리 주체를 호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거기까지’다. “다가올 이상사회는 … 한결 자유롭고 개인주의적 모습일 것이”라는 『평전』의 말미는 비장하지만 ‘정치적’ 울림으로 다가 오지는 않는다.


박헌영이 참여했던 고려공산청년단 기관지의 이름은 『올타』였다. 사회운동은 자신들이 ‘옳다’, 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주류에 저항하는 사회운동세력에게 옳음은 대중의 지지 이전에 존재하는 그들의 존재이유다. 그들은 옳기 때문에 언젠가는 대중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승리를 보장하는 완전한 계획이나 확신이 없더라도, 실패하여 죽으리라는 것을 빤히 내다본다 해도 불의를 향해 달려드는 것이 인간의 역사였다.” 맞다. 사회운동은 그 자체가 이상의 삶이다.


그러나 정치권력을 장악하고자 한다면 옳고 그름의 이분법으로 정치적 다수를 획득하기란 불가능하다. 대중의 관점에서는, 옳지만 나쁜 것이 있을 수도 있고 그르지만 좋은 것이 있을 수도 있다. 정치의 세계는 옳고 그름이 지배하는 세계가 아니다. 옳고 그름의 이성으로 좋고 나쁨의 감성을 이기기 어렵다. “권력은 적당히 타락하고 적당히 비열한 자들이 차지할 수 있는 욕망”이지만, 권력을 장악했을 때 그른 것, 다른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면, “자본주의보다도 더 반동적인 봉건체제”가 출현할 수밖에 없다. “박헌영의 생애에 진정한 오류가 있다면 이 전대미문의 전체주의 체제를 끝까지 찬양한 데 있었다”는 가혹한 평가를 보게 된다.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이 정치의 세계에 진입했을 때, “합법적 대중정당으로 출발하는 이제는 진보라는 커다란 테두리 안에서 보다 다양하고 복잡한 생각과 경험을 가진 이들을 하나로 끌어모아 화합을 이뤄내 단결시킬 필요가 절실했”지만, “(다른 세력을) 설득하는 정치활동에 시간을 소모하기보다는 분노가 턱까지 차올라 폭발하기 직전인 민중들의 생존권투쟁을 이끄는 게 더 급”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옳음만을 강조할 때, 그른 것, 다른 것과의 ‘연합’은 불가능하다.


물론 좌파가 직면했던 구조적 제약을 무시할 수는 없다. 미국과 소련이 냉전을 구조화하고 “소련의 사회주의 패권주의”가 “김일성 부대에게 한반도 공산주의운동의 미래를 맡”기려 하던 시점에서 남한의 좌파가 할 수 있는 일의 한계는 분명했다. 사회민주주의자조차 정치공간에서 생존할 수 없었다. 또 다른 강대국인 중국이 1950년 전쟁기에 북한을 지원한 이유는, 북한이 생존해야만 중국이 미국과 직접 마주하지 않게 하는 ‘완충지역’이 만들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국제관계가 가하는 구조적 제약을 읽었다고 해서 다른 대안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좌파에게 제국주의론을 넘어서는 국제관계론은 없었다.


박헌영의 옳음은 마르크스주의에 의해 담보됐다. 강철서신을 만들었던 이들에게 옳음은 주체사상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주체사상을 포기하는 순간 그들은 또 다른 옳음을 찾아야 했고, 그것은 바로 옆에 있던 잃어버린 우산인 우파의 이념이었다. 『평전』에서 옳음은 불의에 저항해야 한다는 비판정신으로‘만’ 남아 있다. 비운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목소리를 듣는다. 비운하지 않으면 좌파가 아닌가. 한 친구가 나에게 『평전』이 가지는 편견을 언급했을 때, 그 편견은 ‘진정한’ 사회주의가 ‘있을 것’이라는 가정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진정한’이란 수식어는 운동과 정치의 세계에서 주체를 호명할 담론이 부재하다는 고백이다.

구갑우 서평위원/북한대학원대학·북한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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