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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은 ‘삶의 의미’를 어떻게 가르칠 수 있을까
대학은 ‘삶의 의미’를 어떻게 가르칠 수 있을까
  • 교수신문
  • 승인 2010.02.22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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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_ 앤서니 T.크론먼 지음, 『교육의 종말』(한창호 옮김, 모티브북, 2009)

오늘날 한국 대학은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학문의 추구보다는 대학 외부, 곧 사회적 환경이 요청하는 바에 응대하는 데 치중하고 있다. 외부적 압박은 전통적인 인문학의 커리큘럼에서부터 강좌나 학과의 존재 필요성까지 회의하게 만드는 풍조를 만들어냈다. 이런 풍조는 한국 대학이 롤 모델로 여기고 있는 미국 대학에서도 오래된 듯하다. 이 책『교육의 종말』(책의 원제는 EDUCATION'S END로 2007년 예일대 출판부에서 간행)을 쓴 저자의 苦言을 들어보면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책의 부제 ‘삶의 의미를 찾는 인문교육의 부활을 꿈꾸며’가 설명하듯, 이 책은 인문교육의 복권과 부활에 무게를 싣고 있다. 북아메리카 동부지역에 정착한 일군의 청교도들에 의해 세워진 하버드대의 역사적 변화 과정을 주목한 예일대 법과대학 석좌교수인 앤서니 T. 크론먼(Anthony T.Kronman)은 미국 대학이 고전주의, 세속적 인문주의, 학술적 연구의 理想이라는 역사적 특성을 보인다고 이 책에서 지적하고 있다. 고전주의와 세속적 인문주의 시대가 학술적 연구의 이상을 추구하는 시대로 변화된 것은 19세기 독일 대학의 이념을 받아들이면서부터라는 크론먼 교수의 설명은 변화를 모색하는 한국 대학의 행보에 적잖은 시사점을 제공해준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미국 대학은 그리스도교적 고전주의, 세속적 인문주의, 학술연구적 이상이라는 세 단계를 거쳐 왔다. 이 가운데 앞의 두 가지는 ‘삶의 문제’를 학문의 핵심으로 제기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지만, 현재 모든 대학에 지배적인 학술연구적 이상은 ‘삶의 문제’를 무의미하게 생각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대학에서 다룰 문제는 아닌 것으로 보편화시켰다. 그 원인은 일차적으로 인문학 담당 주체들의 인문학에 대한 확신 부족과 정치적 공정성의 논리 및 학술연구적 이상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에 있다.

크론먼 교수의 이런 지적은 학자들이 한국연구재단(구 한국학술진흥재단, 과학재단)을 통해 프로젝트를 지원받는, 국가가 학문을 관리해주는 방식에 친숙해져가는 한국의 지식 생산 풍토에서 대단히 근본주의적인 비판이 될 수 있다. 그가 『교육의 종말』을 집필하게 된 동기는 아마도 한국 인문학자들의 상당수가 ‘내면에’ 품고 있음직한 대학의 방향성에 대한 물음과 닿아 있을지 모른다. 그런 고민이 묻어나는 대목을 들어보자.      

“지난 40년 동안 나는 차례로 학생, 교수, 학장을 거쳤다. 이제 나는 10년간의 학장 생활을 마치고 다시 교수다. 또한 지난 28년 동안 나는 예일 로스쿨 교수진의 일원이었다. 현재는 예일 대학에서 신입생을 위한 프로그램을 가르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서양 전통의 토대를 이루는 철학, 역사, 문학, 정치학 분야의 위대한 저작들을 공부하는 데 전념한다. 다양한 역할을 맡아오며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내 신념 가운데 많은 것들이 바뀌었지만, 대학이란 단순한 지식을 전수하는 장소만이 아니라 삶의 신비와 의미를 탐구하기 위한 포럼(forum)이고, 이런 탐구는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문학적·철학적 상상력을 지닌 위대한 저작들을 주의깊게 비판적으로 읽음으로써 가능하다는 근본 신념에는 변함없다. 나는 삶의 의미도 가르칠 수 있는 주제라고 확신한다. 그리하여 교수로서의 나의 모든 삶은 이런 확신의 정당성을 입증하고, 학생들에게 전수하는 데 바쳐졌다.

내가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도 바로 그 때문이다. 나는 삶의 의미에 관한 의문이 체계적인 교과목의 중심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는 것과 그 의문의 중심에 있던 인문학이 존중받지 못하고 변방으로 밀려나는 것을 목도했다. 그때 나는 상실감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내가 그런 감정을 느꼈던 것은, 삶의 의미에 대한 의문이 대학에서 교육될 수 있고, 교육되어야 한다는 신념에 직접 헌신해보았기 때문이다. 교수와 학장을 지내면서 나는 이러한 의문이 인문학에서 추방되는 걸 지켜보았다.”

이런 고민과 의문 끝에 크론먼 교수는 ‘삶의 의미에 대한 의문’이 대학의 인문학에서 추방되게 된 요인을 ‘권위화된 현대의 학술적 연구’와 ‘정치적 공정성’에서 찾았다. 예일대의 ‘지도연구 프로그램’에 몸담고 있는 그는 “왜 삶의 목적이 대학의 체계적인 교육 목록에서 사라져버렸을까?”라고 질문한다. 그는 학생들 개개인이 삶의 목적에 관한 자신의 답을 찾아갈 수 있도록 인문학 교수들이 안내할 수 있었던 시절을 환기하면서 학술연구적 경향성의 적절한 수용을 통해 대학 내에서 인문학이 담당해야할 본연의 사명을 완수할 때, 삶의 문제가 실종돼 버린 대학의 위기가 극복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학술연구적 이상이 한국의 대학을 사로잡고 있는 이즈음, 크론먼 교수의 고민과 의문도 이 땅의 지적 성찰성의 지평으로 수렴될 수 있을 것 같다.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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