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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조성식 선생님을 기리며] “이제, 그토록 좋아하던 술 맘껏 드시길 …… ”
[故 조성식 선생님을 기리며] “이제, 그토록 좋아하던 술 맘껏 드시길 …… ”
  • 박영배 국민대 영어영문학
  • 승인 2010.02.22 14: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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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롭게도 출제에 떠밀려 들어 간 작년 12월 중순, 출제와 시험이 끝나고 저녁 늦게 갇힌 문 밖을 나서는 날, 선생님께서는 제가 들어온 지 사흘 째 되던 날 아침에 홀연히 세상을 떠나셨다는 슬픈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녁 늦게 학교 연구실에 와서 한동안 멍하니 천정을 바라보던 기억을 떠올린 것이 벌써 한 달이 다 돼갑니다.

선생님께서 서울대에서 고려대로 옮기시고 30년 가까운 세월을 안암골에서 보내셨으니, 저와는 인연이 없을 법도 하련만, 같은 분야의 길을 걷는 학문의 스승으로 20년 가까이 곁에서 선생님을 모셨으니, 선생님의 부음을 안타깝게 여기는 제자들의 마음과 어찌 같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해마다 댁으로 세배를 가면 선생님께서 빼놓지 않고 말씀하시는 얘기는 수백 번도 반복해서 들은 군대 이야기였습니다. 일정 말에 일본 군대를 겪으시고 6.25때 미국 군대를 경험하신 선생님께서 인천상륙작전시 맥아더장군과 함께 상륙하신 얘기와 미 8군 사령관인 테일러 장군의 한국어 교관으로 일하시던 얘기를 하실 때에는 마치 두 분이 함께 계신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말씀하시던 기억이 새삼 떠오릅니다.

선생님께서 고려대에서 가르치실 때 일어났던 많은 일화들, 그 중에서도 거듭 탈락해 졸업을 못하게 되자 약혼자와 함께 연구실로 선생님을 찾아뵙고 “이번에도 또 낙제하면 자살하겠노라”고 울며 호소한 여학생에게 빨리 나가 죽으라고 호통을 치셔서 여학생이 혼비백산해 도망갔다는 무서운(?) 일화는 지금도 후학들에게 선생님의 엄격하신 성격을 잘 보여주는 스승의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선생님을 찾아뵈올 때마다 ‘책 쓰고 운동하고 술 마시는 일’이외에 다른 일을 하면 절대 안 된다고 저에게 늘 말씀하시던 생각이 납니다. 제가 10여 년 전 토론토대에서 연구할 때 선생님께서는 이미 몇 년 전부터 셰익스피어 구문론을 쓰실 구상을 하시고 셰익스피어 희곡(38편) 원서를 다시 읽고 정리하신다는 장문의 편지를 자주 써서 보내주셨는데, 17년 동안의 오랜 작업 도중 백내장 수술까지 하신 끝에 2007년 두 권으로 된 1천700쪽 분량의 방대한 셰익스피어 구문론을 완간하신 일은 일본 학자들도 감히 이루지 못한 위대한 업적이었습니다.

해방 후 반세기가 지났으나 한국의 영어학분야가 일본에 비해 많이 뒤떨어져 있다고 늘 말씀하시던 선생님, 요즘 대학이 옛날의 대학과 너무 달라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던 선생님, 후학들에게 늘 기계처럼 정확하고 엄격하셨던 선생님, 그러나 술을 매우 좋아하시고 술을 즐기시는 시간이 너무 길어져서 저 혼자 속으로 많이 걱정하며 밤늦게 댁으로 모셔다 드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던 선생님.

이제 하늘나라에서 그토록 좋아하시던 술을 많이 드시고 영생과 극락을 마음껏 누리시길 빕니다.

박영배 국민대 영어영문학과· 전 한국영어영문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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